로션이 떨어져서 화장품가게에 갔더니 점원 아가씨가 로션을 팔고나서는 다른 상품들도 권한다. 이거 한번 써보세요. 요즘은 이렇게 비누도 크림 형태로 나오지요. 아직도 딱딱한 비누로 세수하세요? 어쩌나, 피부가 거칠고 빨리 노화되는데. 집에 자녀는 몇이시죠? 아이들은 특히 피부가 약해서 빨리 비누를 바꿔주셔야 돼요.
초등학교 다니는 딸에게 ‘*** 영어교실’을 시키고 있는데, 한 외국어고등학교 교사가 와서 부모들에게 외고 입학과 수능시험에 대비한 특강을 하니까 오라고 한다. 아이가 아직 초등학생인데 벌써 그럴 필요 있겠냐고 안 가겠다고 하자 선생님이 놀라서 소리친다. “수능, 그렇게 먼 거 아녜요. 지금부터 준비하셔야죠.”
요즘 TV에 나오는 손해보험협회의 공익광고캠페인도 장난이 아니다. “아빠, 일찍 들어와” 하는 어린 딸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로 깔리면서 희미하게 웃음짓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로 다음 순간 이것이 교통사고로 길바닥에서 비명횡사하는 남자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어 자막이 뜬다. ‘가족과의 소중한 약속, 속도를 줄이면 지킬 수 있습니다.’ 공포영화 스타일을 차용한 캠페인이라니!
세끼 밥의 반찬쯤으로 공포를 떠먹이는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줄기차게 아침저녁으로 상쾌한 비누세수를 해왔건만 그 익숙한 비누로 세수를 하는데 이젠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젠장.
미국의 ‘꼴통’ 반골인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은 공포심을 퍼뜨려서 권력을 유지하는 집단과 공포심을 퍼뜨려서 돈을 버는 집단을 성토하는 다큐멘터리다. 앞의 것의 대표적인 예는 공화당 정부이고 뒤의 것의 대표적 예는 무기산업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미국총기협회 회장 찰턴 헤스턴은 “총으로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고 외치고, 테러사건에 연루됐던 자칭 좌파 인사는 “썩어빠진 사회를 다 쓸어버려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컬럼바인고등학교 총기난동 사건 때 문제학생들이 마릴린 맨슨의 팬이었다는 이유로 맨슨이 이 사건의 원인제공자로 집중공격을 받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다큐멘터리 인터뷰들에서 가장 논리적인 건 마릴린 맨슨이다. “텔레비전은 온통 공포를 조장한다. 홍수, 에이즈, 살인…. 광고도 공포효과를 노린다. 그게 우리 경제의 기초다?
사실, 공포의 메커니즘이란 모든 조직과 사회의 실존적 기반이다. 그것은 인류역사만큼이나 유서 깊다. 그것은 역사의 지층들을 통과하는 동안 상식이 되고 관습이 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에 대한 악소문이 종교가 다른데다 우수한 소수자에 대한 박해 차원에서 생성된 것처럼, 호남 사람들의 인간성을 매도하는 말들도 ‘차령 이남 사람은 등용 안 한다’는 고려조 이래 지배권력이 피억압지역인 동시에 곡창지대인 이곳 사람들을 견제하려고 퍼뜨렸을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수많은 속담이나 미신들도 가만히 보면 모두 어떤 현실적인 필요가 있다. 가령, 밤에 손톱을 깎으면 재수없다는 것도, 옛날에 어두컴컴한 호롱불이나 촛불 밑에서 손톱을 깎다보면 다칠 수 있다는 데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밤에 휘파람을 불거나 피리를 불면 귀신 또는 뱀이 나온다는 속담도 비슷한 맥락이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규율을 관철시키는 손쉬운 방법이다.
브라질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한다. ‘망고를 따는 사람이 그걸 먹으면 병 걸린다.’ 이 속담은 농장 주인들이 지어냈다고 하는데 그 의도가 빤히 보인다. 망고를 따는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망고를 슬쩍슬쩍 먹으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도 공포의 유령들이 그야말로 떼거지로 배회하고 있다. ‘개혁이 나라 망친다’는 공포도 그중 하나다. 재수가 더럽게 꼬여서 ‘극렬 좌경 세력’에 국가권력을 내주긴 했지만 10년 이상은 절대 용납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개혁에 대한 공포를 퍼뜨리는 주범이다. 하나, 전세계적으로 공포제조의 명가는 역시 부시 정부다. 대량살상무기의 이동을 막기 위해 북한을 해상봉쇄해야 한대나 어쩐대나. 조간신문을 열면 아침밥과 함께 입속으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공포들이 떠밀려들어온다.
‘이 공포신드롬 가운데서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반드시 가려내야 해. 그걸 못하면 너는 공포심의 노예가 되고 마는 거야!’ 등골이 서늘하다. 아니, 이건 또 누가 퍼뜨리는 거지? 조선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