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교사가 엽기적인 수업자료를 사용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소파 개정’의 당위성을 가르친답시고 어린 중학생들에게 어느 여인의 사체 사진을 보여준 것이다. 칼로 난자당한 뒤 국부에 우산대를 꽂고 온몸에 가루비누를 뒤집어쓴 채로 숨진 참혹한 모습. 경찰청 문서철 속에나 있어야 할 이 끔찍한 살인의 추억이 졸지에 중학교 교실에 들어와 교재로 돌변한 것이다. 하필 이 사진이 다른 엽기적 사진들을 제치고 나 홀로 교재(?)로 채택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범죄를 저지른 자가 우연히 미군병사였기 때문이다.
윤금이씨 사건. 이미 10년도 더 된 사건인데, 최근 이 사진을 볼 기회가 부쩍 늘어났다. 광화문 교보문고 옆에서는 이 사진의 상설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왜 그럴까?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이 있을 게다. 이른바 ‘NL’에 속하는 이들은 종종 사체 사진을 사용하는 것의 정당성(심지어 효율성)을 강변한다. 장갑차에 깔려 몸 밖으로 시뻘건 살을 드러낸 두 소녀의 참혹한 사진도, 그것을 보고 미국에 분노할 계기가 된다면, 얼마든지 공공장소에 내걸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단순한 교통사고 사진이 엄청난 반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살인범죄 사진을 내걸면 그 효과가 오죽하겠는가? 이게 그들이 이 사진에 거는 부푼 기대이리라.
어떤 이들은 묻는다.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사진도 전시했는데, 왜 두 소녀와 윤금이씨의 사진은 공개하면 안 되냐고. 간단하다. 두 소녀는 무의도적인 사고의 희생자, 윤금이씨는 어떤 사적 범죄의 희생자였다. 반면 광주의 희생자들은 국가가 행한 어떤 의도적 폭력의 공적 희생자들이다. 게다가 학살을 저지른 군사정권은 학살의 사실 자체를 부인했고, 때문에 그 거짓말을 반박할 증거로서 사체 사진의 공개가 필요했던 것이다. 반면 두 소녀와 윤금이씨 사건의 경우 그 누구도 범행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체 사진으로 공적으로 증명할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두 사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두 소녀의 사체가 미군의 잔인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사고였기 때문이다. 살해당한 여성의 사체 역시 미국의 잔혹성을 증언하지 못한다. 그것은 기껏해야 ‘한’ 미군병사의 엽기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생각해보라. 우리 사회에도 잔혹한 살인범들은 여럿 존재하나, 그들의 존재에서 어디 한국인 전체가 잔인하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한마디로 그 사진들은 아무런 논리적 설득력도 갖지 못한다. 그 사진이 발휘하는 힘은 어떤 비논리적인 것, 즉 인간의 피가 불러일으키는 어떤 원시적인 감정의 선동이다.
생각해보라. 미선이, 효순이가 자기들의 딸이라면, 저들이 그 끔찍한 사체 사진을 버젓이 지하철역에 내붙였겠는가? 윤금이씨가 자기들의 누이라면, 그 참혹하게 유린당한 사체 사진을 버젓이 구경거리로 길거리에 늘어놓겠는가? 또 죽은 자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라.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의 소녀가 과연 자기들의 사체 사진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겠는가? 한 많은 삶을 살았을 윤금이씨. 그가 과연 자신의 처참한 최후를 백주대낮에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어하겠는가? 저들은 왜 죽은 자들을 또 한번 죽이려 하는 걸까? 대체 저들은 무슨 권리로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교실에서 윤금이씨 사체 사진을 교재로 사용한 그 교사도 알고 보니 여성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입장을 바꾸어 그 교사가 윤금이씨 처지라면, 참혹하게 유린된 그 몸으로 기꺼이 미국의 만행을 폭로하는 시청각 자료가 되고 싶어할까? 그럴 리 없을 게다. 인사동 거리에서 어여쁜 목소리로 미선이, 효순이에게 애절한 정을 표하던 여학생들. 확성기를 든 그들의 앞에도 예외없이 소녀들의 참혹한 사체 사진은 놓여 있었다.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때가 있으니, 가끔 잔인함은 텅 빈 머리에서 튀어나온다.
보다 못한 여성단체에서 윤금이씨 사진을 정치적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성명을 냈다. 하지만 “강간을 하려면 너네 나라 가서 하라”는 민족지사(?)들에게 과연 이 호소가 먹히겠는가? 여성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윤금이씨는 계속 정치적으로 윤간당하고 있다. 저들의 왕성한 정치적 성욕 앞에서 사체마저 안전하지 못한 것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념 깡패들의 가학적 사체선호증을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