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창조적인 존재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성이야말로 인간을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로 특징짓는 것이라고 열을 올리기도 한다. 외계인이라는 설이 끈질기게 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은 아니라도 누구나 조금씩의 창조성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TV가 등장하면서 창조성이 활약할 여지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TV에서 쏟아내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수용할 뿐 스스로 무언가를 창조해낼 능력은 물론 의지도 사라진 게 현대인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변형 버전 러다이트 주의자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역시 TV라는 매체에서 벌어지는 게임 공간 속에서 창조성은 다시 한번 설자리를 찾았다.
<GTA3>는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다. 과도한 폭력과 성적 묘사로 심한 논란을 일으켰고, 국내에는 아예 출시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최고의 판매량을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초보 조폭이다. 마약 심부름이나 암살 같은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면서 조직 내에서의 지위를 점점 높여나간다. 이 게임의 자유도는 대단히 높다. 차가 필요하면 길가던 사람에게서 빼앗으면 된다. 누구를 죽이건 폭행하건 아무런 제한이 없다. 경찰이 막으면 경찰을 죽이면 된다. 꼭 시키는 일만 할 필요는 없다. 빼앗은 차를 몰고 다니면서 하고 싶은 짓을 마음대로 한다. 총을 쏘고 불을 지르고 각목을 휘두른다.
<GTA3> 게이머들의 창조적 본능을 자극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게, 2002년 미국에서 발생한 무차별 소총 저격사건이다. <GTA3>에서는 스나이퍼 저격이 가능하다. 게이머들은 저격범 사건을 누가누가 더 잘 흉내내나 경쟁하기 시작한다. 숲에 잠복해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의 머리를 겨냥한다. 중요한 건 단 한방에 날려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회심의 스크린숏을 홈페이지에 올려놓고는 누가 제일 그럴듯한가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벌인다. 이 게임의 스나이퍼 시스템은 이유없이 남들을 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게이머들의 위대한 창조성은 이를 미학 콘테스트로 바꿔놓았다.
이른바 ‘후커 치팅’이라는 것에서 창조성은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다. <GTA3>에서는 아무에게나 폭력을 휘두를 수 있을 뿐 아니라 돈도 뺏을 수 있다. 길을 가던 사람을 잡아 두들겨패면 플레이어의 소지금이 높아진다. 그런데 가끔은 상대가 저항하기도 한다. 용감한 시민이나 경찰과 싸우다보면 체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묘하게도 체력 회복수단은 매매춘이다. 매춘부를 차에 태워 으슥한 곳으로 간다. 차가 열심히 요동치고 체력은 회복된다. 대신 소지금은 줄어든다.
하지만 게이머들은 대가없이 체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창조해냈다. 체력이 낮아지면 매춘부를 차에 태워 으슥한 곳으로 가 일을 벌인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매춘부를 각목으로 사정없이 두들겨팬다. 여자는 저항하려 하지만 소용없다. 실컷 두들겨맞고는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빼앗긴다. 게이머의 체력은 전부 회복되었지만 돈 한푼 들지 않았다. 일진이 좋았으면 오히려 소지금이 늘었을 수도 있다.
창조는 아찔한 쾌락이다. 게임을 설계한 사람들이 정해놓은 틀을 벗어나 스스로 즐기는 방법을 개발하는 즐거움은, 시키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를 때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TV라는 위대한 지도자에게 인간이 완벽하게 길들여졌다는 주장은 오류라는 것이 밝혀졌다. 인간은 여전히 욕망하는 존재다. 창조의 본능은 아직은 완전히 탈색되지 않았고,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해방된다. 그렇지만 창조성이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게 한다는 주장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다. 박상우/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