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생각도감
내게 너무 무거운 나의 몸,<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몸무게 135kg의 초거구 뚱보 여인을 보고 놀라거나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슈퍼모델 빰치는 미녀로 보이고 게다가 그녀의 아름다운 내면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면, 이 세상은 사랑으로 충만하리.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누가 짝을 찾지 못해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내고 있을 것이며 농촌총각 결혼문제가 웬말이며 성형수술 열풍이 무슨 필요 있으랴. 그렇다. 세상 사는 게 이다지도 힘겨운 까닭은 다름 아닌 외모, 몸뚱이 때문이었다. 외모를 초월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많은 남녀들이 제 짝을 찾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외모만 초월할 수 있었다면 백인, 흑인, 황인, 얼룩인 아무런 차별없이 세계평화 순조로웠을 것이고 외모만 초월할 수 있었다면 사람의 가치를 물리적 능력보다는 정신적 능력, 영혼의 순수함, 마음의 정결함을 보고 판단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결코 외모에 대한 판단 기준을 포기할 수도 없고 몸뚱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단언하건대 죽기 전엔 절대로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 어떤 사고방식도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몸이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결론지어진다. 혹자는 몸은 영혼이 기거하는 집으로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증명된 바 없으니 하나의 가설일 뿐이고 역시 분명한 것은 만난 적도 없는 내 영혼보다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데면 뜨겁고 굶으면 배고픈 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차원이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세계 아니던가. 그리하여 인간이 경영하는 세상 만사는 몸을 위해 지어지고 몸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생존의 가장 기본 조건인 의식주가 다름 아닌 몸을 보호, 보존하기 위한 기본 조건 아닌가. 행복이란 것이 다름 아닌 등따습고 배부른 것이며, 모든 첨단과학 기술이 추구하는 이상향의 유토피아도 알고보면 고달픈 육체적 노동없이 등따습고 배부른 세상을 이루겠다는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 자동차, 컴퓨터, 카메라, 비디오, 여행, 좋은 집, 엘리베이터, 일류 요리사, 유기농…. 현대의 모든 테크놀로지의 목적도 오로지 몸의 편리를 위하여 진화하고 있다.

몸은 행복의 시작. 몸은 행복의 주체. 그러하니 행복이란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몸은 터부시하고 영혼과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도 몸을 먼저 빚고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 영혼이 빠져나간 몸조차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개인의 운명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사주팔자, 별자리를 따져도 ‘몸이 언제 이 세상에 났느냐’ 하는 시점과 현재 어디서 살고 있느냐는 몸의 위치가 중요한 키워드이다. 몸이 나고 운명이 따른다는 거다.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는 잠시나마 자신을 지배하던 몸의 관념에서 벗어난 주인공이 누리는 행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너무 뚱뚱한 그녀와 네발로 걷는 남자와 꼬리가 달린 남자, 그리고 더 많은 수의 잘나거나 못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로맨틱코미디를 가장하고 몸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들이 몸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는 대신 어떤 행복을 가질 수 있는지 몇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요즘 심각한 청년실업자라면 몸에 대한 몇 가지 욕구를 포기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못생겼지만 착한 여자를 원한다면 당신이 더이상 외롭지도 않을 텐데. 하지만 우리가 가장 슬픈 순간은 사실 몸을 위한 욕구들을 포기할 때인 것을 어쩌리. 보고픈 이를 못 보고,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가고 싶은 곳 못 가고, 하고 싶은 것 못한다는데 대체 이 몸은 왜 사느냐 말이지. 결국 인간이란 오감을 통해 복잡한 화학반응을 하고 있는 단백질덩어리일 뿐. 행복도 고통도 결국 화학반응일 뿐. 김형태/ 無規則異種藝術家 kongtem@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