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혁명을 시작으로 지구 곳곳에 사회주의 나라들이 생겨났다. 그 나라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나라들과 긴장하며 자본주의의 야만을 극복한 사회를 시도했다. 70여년 뒤, 그 가운데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현실 사회주의’의 그런 결과는 대개 사회주의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사회주의란 실현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끔찍한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약탈적 형태로 내달리는 오늘 우리는 10여년 전 그 일을 한번쯤 되새길 만하다. 그 사회주의는 우리가 확신하듯 그저 끔찍한 것이었나.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회주의적 시도는 미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주의에 존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게 무너지고 만 게 애석한 일이라면,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좀더 사려깊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회주의를 판단하는 이런저런 정보들이란 대개 (CNN에 의해 걸러진 이라크처럼) 다시는 지구상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걸러진 것이다. 사실 한 사회가 살 만한 곳인가를 판단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는 실수는 사회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자유’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 자유란 단지 자본주의적 자유다.
자본주의가 야만의 체제인 건 경쟁력 있는(잘나고 능력있는) 소수의 인간은 한없이 안락하고, 평범한(정직하고 성실할 뿐인) 다수의 인간은 한없이 고단한 인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안락한 소수에겐 고단하게 살아볼 자유마저 보장되지만 고단한 다수에겐 고단하게 살 자유만 보장된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어디에나 진열되어 있지만, 돈이 없으면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적 자유가 제한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제한은 좀더 많은 정당한 자유를 위한 제한이다. 사회주의에선 경쟁력 있는 소수가 평범한 다수보다 몇백 몇천배 안락할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선 그게 정당한 일일 수 있지만 사회주의에서 염치없고 부도덕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선 제 아무리 경쟁력 없는 사람도 사회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면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할 자유가 보장된다.
경쟁력 있는 소수에게 사회주의란 달갑지 않은 것이다. 나처럼 잘나고 능력있는 사람이 저런 평범한 멍청이들과 큰 차이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견딜 수 없는 모욕일 테니. 그러나 한없이 고단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여전히 희망의 근거다. 사회주의는 유식한 혁명가들의 고민거리가 아니라 나와 내 새끼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거리인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되새겨보는 일은 그런 고민을 푸는 한 갈래가 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목소리나 사회주의에 살았으되 자본주의적 자유를 갈망했던 특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주의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다. 우리가 이라크 전쟁의 진실을 이라크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듯 말이다.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요구르트 먹고 장수한다는 광고에 나온 그 마을)엔 더이상 장수노인들이 없다. 마을 묘지엔 1990년즈음 세해 동안 죽은 사람들의 묘로 그득하다. 마을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다. “사회주의 시절엔 안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진 않았다. 소박하나마 집과 자동차도 나왔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노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그 노인들의 장수비결은 요구르트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던 셈이다. 그게 그 마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김규항/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