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이 내 팔을 부드럽게 스치더니 무릎에 놓인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내 손가락을 감싸쥐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그래, 너무 좋아. 난 오직 이 순간을 원했고,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 손을 제외한 내 몸은 온통 차갑고 어두운 껍질처럼 느껴졌다. 생명은 내 손목에서 시작되고, 손바닥은 부드럽게 맥박치고, 손가락 끝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위 글에서 ‘손’이라는 글자에 괄호를 치고 빈칸을 채우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슨 낱말을 집어넣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 그 다름 때문에 어쩌면 이게 인간성 테스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신화에서 좋아하는 신 골라내기처럼. 어쨌든 위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워낙 입술 중심의 기호와 성기 중심의 접촉에 탐닉해 있다보니 손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 유심히, 찬찬히 손을 들여다봤다. 위 글이 나온 책은 전반적으로 느끼했지만- 그 느끼함에는 책 날개에 붙은 틱낫한의 책 소개와 그 책의 번역자 이름이 중요한 몫을 하기도 했다- 이 구절만은 몸의 어떤 부분에 닿았고 손을 돌아보게 했던 것이다.
아무리 찬찬히 봐도 새삼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손 말이다. 누구의 말처럼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라면 손은 칼날이고, 쟁기날이다. 그 물건들을 물건답게 해주는, 물건이 본래 하고자 하는 바, 즉 본질적 기능을 다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온갖 짓을 다하는 게 손이다. 손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오늘의 명언도 많다. 주는 사람 손 부끄러우니 빨리 받아, 손 빠른 놈, 손 큰 놈, 손을 써두었으니 걱정마셔, 그놈들 손을 좀 봐야겠구먼…. 좋건 나쁘건 많은 일이 손에서 시작된다. 궁금하면 손부터 나가서 만져본다. 그러니 뭐가 전시된 곳에 가면 만지지 마세요, 눈으로만 보세요가 쓰여 있다. 손은 가치중립이다. 그저 수단일 뿐이다.
손은, 엄지손가락의 지문을 통해 한 사람을 통째로 구별할 수 있게도 하지만,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위 글에서 손은 사랑을 드러냈지만 안 좋은 것도 드러낸다. 주부의 노동은 습진걸린 손이 대신 말해주고, 불행한 이주 노동자의 징글징글한 삶의 고통은 손가락이 잘려나간 손이 말해준다. 낯부끄러울 때 그 낯 위에 올라가 낯을 가려줌으로써 낯을 대신하는 것도 손이다. 손이 없으면 누굴 잡을 수 없다. 눈맞은 사이래도 손으로 잡지 않으면 다음 단계인 배맞춤으로 나갈 수 없다. 손으로 안 잡히면 어쩔 수 없다. 거기서 그만이다. 마음 간다고 손이 가는 게 아닌 것이다. 마음속에 간직할 수밖에 없으면 쓸쓸할 수밖에.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시의 제목은 <사랑하는 손>인데, 사랑한다고 손을 잡았는데 열 손가락에 걸리는 게 고작 존재의 쓸쓸함이라니. 이미 끝장난 사이로군. 사랑하는 손이 아니라 잊혀진 손, 멀어져간 손이로군. 손은 하난데 거기서 사랑이 솟기도 하고, 거기에 쓸쓸함이 걸리기도 하고, 손은 참 묘한 것이로군.
손은 몸에서 가장 쉽게 부려지는 것이지만, 그 쉽게 부려짐 때문에 가장 쉽게 망가지고 천대받는다. 그러니 손은 몸의 최전선이고 몸의 소외의 상징이다. 손이 망가져 있는 것은 그것을 유기체의 일부로 가진 몸이 망가져 있는 것과 똑같다. 돌멩이는 아무리 부서져도, 부서진 조각이 여전히 돌멩이지만, 몸에서 떨어져나간 손가락, 손은 이미 손이 아니다. 사람의 몸과 손을 돌멩이처럼 취급하는 세계와 사람의 몸과 손을 있는 그대로 취급하는 세계는 전혀 다른 종류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벌써 앞의 입장을 신봉하는 기계론의 세계다.
처참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문득 자각한 순간, 다시 한번 손을 들여다본다. 멀쩡하네. 죽은 기계가 살아 있는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먹어도 냉담한 이 야만의 땅덩어리에서 그거면 된 거 아닌가.강유원/회사원 ·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