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TV 서프라이즈>MBC 일 오전 11시
일요일 아침 11시, 늦잠을 자고 일어난 뒤 별 생각없이 TV를 켠 시청자들은 충격적인 고발이나 심층 분석에도 관심이 없지만 뻑적지근하게 놀아보자고 덤비는 프로그램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씻지도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신기한 TV 서프라이즈>를 보고 있으면, 몰입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과 더불어 입담 좋은 친구의 수다를 듣는 듯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작고한 문학평론가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이야기를 하고, 듣는 걸 워낙 좋아하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신화와 전설이 이야기를 좋아했던 옛 사람들의 유산이라면, 드라마와 영화는 요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친구나 동료들과 삼삼오오 모여 노닥거리면서, 사람들은 쉼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어제오늘 겪은 이야기, 다른 사람이 사고친 이야기, 아무개에게 들은 이야기…. 말하는 사람이 솜씨가 있으면 ‘사건’에 기승전결이 생기고, 하이라이트에 반전까지 있다면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신비한 체험이나 베일에 싸인 역사의 수수께끼를 쉼없이 풀어놓는 친구에게 “진짜야?” 혹은 “정말로?”를 연발하며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방송 초기에는 그다지 높지 않았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시청률은 회를 거듭할수록 높아진다. 이야기의 힘이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속에 나타나 신랑감 사진을 내밀더라는 이야기, 모르는 사람이 꿈에 자주 등장했는데 훗날 결혼을 하고보니 돌아가신 시아버지였다는 사연,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느 노학자의 고백….
만약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면, 시청자들은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저런 억지가 어딨느냐’며 금세 채널을 돌려버릴 것이다. 현실은 때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지만, 사람들은 ‘있을 법한 일’을 다루는 드라마가 더 그럴듯하다고, 현실과 닮았다고 느낀다.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의 어색하고 촌스러운 재연, 그 아마추어리즘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얼굴이 알려진 배우들이 연기력을 십분 발휘해 짜임새 있는 드라마로 엮어낸다면 그 이야기가 ‘논픽션’이라고 백번을 얘기해도 어쩐지 믿기지 않을 것 같다. 아마추어리즘과 논픽션의 짝짓기는 1990년대 중반 MBC에서 방송해 인기를 끌었던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에서 시작돼 요즘은 방송가에 일종의 공식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허구성이 너무 짙어 영화와 드라마로는 다루기 어려운 ‘논픽션’을 무기로, <신기한 TV 서프라이즈>는 한 가지 실험을 한다. 실제 있었던 일과 제작팀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섞어놓고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게임은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로, 출연자와 시청자 모두가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종류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거워하는 건 이야기의 ‘진정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때 “정말?”이라고 반문하는 것은 추임새일 뿐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은 아닐 텐데도, 이 게임은 상당히 재미가 있다. 허구 같은 실재와 실재 같은 허구 중에서 진짜 허구는 과연 무엇일까?
출연자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거짓으로 지목하는데, 답은 종종 ‘가장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묻는 게임은, 뜻밖에도 보통 사람들이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방송 초기엔 세기의 수수께끼나 역사의 뒷이야기 등을 적극적으로 발굴했던 제작진이 요즘엔 주로 시청자의 제보에 의지해 방송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조상의 혼령이나 억울한 죽음, 기구한 사랑 등 익숙한 소재에 상황만 조금 바뀌는 경우가 많아졌다. 회를 거듭하면서 방송 소재가 고갈된 탓도 있겠지만, 좀더 분발해줬으면 한다. 시청자들이 공인하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명예를 걸고!이미경/<스카이 라이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