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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퓨처랜드,<여인의 음모>
2003-06-11

20세기 언젠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도시. 파리 한 마리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시작된다. ‘터틀’이 순식간에 ‘버틀’로 바뀌면서 꿈도 야망도 없던 주인공 샘 로리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괴상한 사건들에 휘말린다. 난방장치가 터지든 말든 센트럴 서비스 직원은 도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꿈속에서 다정하게 손짓하던 공주님은 어느샌가 현실의 트럭 운전사로 바뀌어 샘을 광인 취급하며, 성형수술로 젊음을 되찾으려던 할머니들은 순식간에 노화현상의 촉진으로 죽음에 이른다. 그렇게 모두가 알려 하지 않는 진실을 언뜻 엿보게 된 주인공은 이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죽음 아니면 미쳐버리는 것 이외의 ‘진정한 탈출’이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서플먼트에 수록된 특작 단편 에서 질문은 되풀이된다. “브라질은 대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웨일스의 작은 해변 마을 포트 달보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테리 길리엄은 털어놓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석탄가루 때문에 새까맣게 변한 해변가에 앉아, 어떤 남자가 라디오에서 이상한 음악을 고르는 풍경을 처음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브라질>(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 노래)처럼 낭만적인 노래를….” 평범한 기록국 직원은 꿈속에서나마 반짝이는 은빛 갑옷을 입고 거대한 날개를 천천히 움직이며 하늘을 비상하는, 마법에 걸린 공주를 악마에게서 구출하는 기사로 변신할 수 있다. 그는 돈키호테이거나 혹은 이카루스다. 테리 길리엄의 ‘꿈의 프로젝트’가 <돈키호테>였음을 떠올려본다면, <여인의 음모>는 낭만적인 노래를 흥얼거리며 잔혹한 현실에 꿈으로 감히 대항하고자 하는 돈키호테의 미래 버전 모험극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 하나.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텍스트가 <블레이드 러너>와 함께 80년대 SF영화의 향방을 단숨에 결정지어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분자가 질서 상태로부터 무질서 상태로 움직여가는 자연현상으로서의 엔트로피 증가(무질서에서 질서로 옮겨가는 그 반대의 과정은 결코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현대 환상소설의 주된 알레고리였다(카프카부터 토머스 핀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목록을 떠올려보라). 잡다한 쓰레기로 가득한 세상을 절망적으로 부정해버린 수많은 선배들의 시선은 <여인의 음모> 곳곳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더이상 예전의 낭만과 환상과 신화와 전설이 끼여들 여지가 없고, 테크놀로지와 진보의 결과물을 끌어안은 채 무질서의 포화상태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은 미래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나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인의 음모>는 세계의 끝을 미리 봐버린 예언자의 절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논쟁적인 엔딩신 때문에 개봉 당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블레이드 러너> 역시 두 가지 엔딩 버전을 찍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다). 제작사는 ‘지나치게 긴 러닝타임’과 더불어 비극적인 엔딩 때문에 재편집을 요구했지만, 테리 길리엄은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크레딧에서 빼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지루한 싸움은 결국 미국 상영본과 유럽 상영본의 편집이 상당히 달라지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테리 길리엄은 직후의 한 인터뷰에서 한탄하듯 말했다. “이 영화를 배급하는 과정은 <여인의 음모>에서 묘사했던 관료사회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내가 그 결말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선이 사라진 순간의 예증이라고 해야 할까. 김용언 mayham@empal.com

Brazil, 1985년감독 테리 길리엄출연 조너선 프라이스, 로버트 드 니로, 이안 홀름, 밥 호스킨스DVD 화면포맷 아나모픽 와이드스크린 1.85:1, NTSC오디오 돌비디지털 2.0 서라운드출시사 이십세기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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