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발자가 있다. 만들고 싶은 것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남들은 그의 게임을 칭송하지만 자신만은 만족할 수가 없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마지막 한 발짝을 어떻게 해야 디딜 수 있을까? 괴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깨닫는다. 기존 틀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은 포기한다. 하지만 용기를 내 벽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 있는 것은 새로운 장르의 씨앗이다.
워 게임은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턴 방식 전략게임이다. 전체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한판 한판에서의 전략적 대결이 게임의 핵심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화이어 엠블렘>이나 <데어 랑그릿사> 같은 게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게임들을 시뮬레이션 롤 플레잉 게임, 줄여서 SRPG라고 부른다. SRPG는 워 게임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생산개념 없이 제한된 유닛을 사용해 택틱스 방식의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전투 유닛들은 더이상 탱크나 비행기가 아니다. 다양한 개성과 외모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투를 겪으며 계속 성장한다.
SRPG의 등장은 롤 플레잉 게임의 끝없이 반복되는 전투에 질려했던 게이머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스토리를 깜빡 잊어버릴 만큼 전투가 많지 않으면서도 전투의 재미가 아쉬울 정도로 적지 않기 때문이다. <화이어 엠블렘>이나 <데어 랑그릿사>처럼 어려운 게임에서부터 <파랜드 택틱스>나 <메타녀>처럼 만만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까지 난이도도 다양하다. SRPG는 특히 동양 게이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이야기의 분기가 다양해진다든가 스테이즈 클리어 조건에 따라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든가 하는 식으로 시스템이 계속 풍부해졌다.
비교적 최근작인 <라 퓌셀>은 SRPG 발전의 정점에 이룬 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했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시스템이 적용되었고 그 밖에도 게임의 중독성을 높여줄 수 있는 온갖 장치들이 총출동되었다. SRPG를 좋아하는 게이머들은 열광했고, 게임을 충분히 즐기려면 적어도 200시간은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마계 전기 디스가이아>는 같은 제작사에서 내놓은 최신작이다. <라 퓌셀>에서 많은 게이머들을 폐인의 길로 몰아넣었던 중독성 높은 시스템들이 모두 계승되었다. 그리고 물론 새로운 것들이 추가되었다. 이 게임 하나만 가지고도 반평생은 너끈히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고, 제목을 <폐인 전기 디스가이아>로 바꿔야 한다는 불평 아닌 불평도 있다.
반평생은 물론이고 200시간 플레이는 게임에 목숨 건 사람이라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SRPG는 성장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하나씩 새로운 것이 추가될 때마다 게이머들은 환호작약 광희난무다. 하지만 동시에 무거워졌다. 계속 쫓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나둘씩 뒤처지기 시작한다. 가쁜숨을 고르며 저만치 앞에서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만 본다. 장르는 탄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사이엔가 대중에게서 멀어진다. 더 하드코어 게이머, 더 마니아 게이머들로 옮겨가다가 왔을 때처럼 급작스럽게 원래 세계로 넘어가버린다. 가장 뛰어난 게임,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게임이 나왔을 때 그 장르가 지닌 생명력도 소멸한다. 안타깝지만 막을 수는 없다. 대중의 입맛을 맞추는 데에만 급급하여 지리멸렬 정체하다가 사라지는 게임과 달리 가장 찬란하게 빛난 뒤 퇴장하는 게임에 후회는 없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