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그의 것, 이야기는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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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의 박명랑 감독
복수를 결심해본 적이 있는가. 잠깐, 너무 비장해질 필요는 없다. 주인공 K의 복수극은 지극히 사소한 데서 출발한다. 그는 버스에서 별 이유도 없이 한 고등학생으로부터 욕설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 꼬맹이에게 저항하지 못한 게 억울했는지 K는 복수를 결심한다. 이제부터 30대 남성의 철부지 10대를 향한 집요한 스토킹이 시작된다. 섬뜩하냐고? 이상하리만치 그의 복수극은 폭소를 자아낸다. “너의 잘못을 기억하는가?”하는 말투도 웃기고, 단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 생업까지 포기하는 그의 태도도 코믹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 누구도 마지막 장면에선 히히덕거릴 수 없을 거다. 편집증, 강박증, 결벽증을 가진 이들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되는 영화.
명랑 청년의 ‘비디오를 둘러싼 모험’ 어린 시절부터 박명랑 감독에겐 이상한 증상이 있었다. 그는 소설책을 읽으면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 못했고, 대신 그 빈 공간을 자기 마음대로 채워넣곤 했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봐도 오직 그만이 스토리를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고등학교 때 학급문집의 빽빽한 소설들을 통해 희한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미뤄볼 때, 그 ‘기억의 오류’가 뇌세포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머릿속에 공상이 가득 찼던 건지 무의식 속에서 이야기가 뒤섞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창작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던 건 확실해 보인다.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를 사 멋대로 영화를 찍은 것도 이런 심증을 굳히게 하는 흔적이다. 사실, 이 결과물은 스스로의 말처럼 “하나같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한 작품의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라면을 끓이는데 달걀이 없어 고양이를 집어넣어 먹었는데, 뱃속에서 고양이가 부활해 그 사람이 죽는다는 그런 내용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마추어 비디오영화라 해도 4년 동안 완성작이 5편, 미완성작이 10편이라면 열의는 대단한 게 아닐는지.
1999년 디지털로 만든 <살인마 잭>은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된 첫 영화로 그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줬다. 그는 당시 심사위원으로 이 영화를 좋게 본 김지운 감독에게 무턱대고 자신의 단편 시나리오를 안겼고, 그 시나리오는 얼마 뒤 인터넷영화 <커밍아웃>으로 만들어졌다. 인연은 이어져, 결국 그는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쓰리>의 에피소드 <메모리즈>에 연출부로 참여할 수 있었다.
고마워, 고등학교 날나리 후배들 <쓰리>로 비로소 영화 만드는 일에 맛을 들인 박명랑 감독은 첫 ‘웰 메이드 프로젝트’ <미안합니다>에 돌입한다. 제작비 600만원은 결혼 축의금과 영화 속 K처럼 외화 번역을 해 받은 돈을 합쳐 조달했다. 기본적인 설정은 그가 실제로 버스 안에서 겪었던 일에서 출발했다. “버스에서 욕하던 아이들이 내리는데, 내가 다녔던 학교의 교복을 입었더라.” 그는 화가 나서 머릿속으로 그들을 응징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상상했다. 편집광적인 인물이나 상황에 매력을 갖고 있는 그는 애초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이 어떻게 상처받고 분노를 폭발시키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꾸미려 했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보니 관심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응징’을 한다며 온갖 논리를 들이대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K를 통해 “제대로 꽂히지 않는, ‘죽은 말’과 그로부터 비롯된 분노와 폭력”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이상한 폭소를 안겨준다. 전주영화제 상영 당시에도 관객은 감독의 생각보다도 훨씬 즐거워했다. 물론 “나도 K와 같은 심정이었는데, 복수하다니 통쾌했다”는 예기치 못한 반응도 있었지만 대체로 영화가 품고 있는 블랙유머를 제대로 받아들였다. 박명랑 감독은 “당시엔 화가 났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고등학교 후배들이 고맙다”고 농담조로 말한다.
이제부터 정말 영화를 배워볼까나. 프로듀서, 촬영, 조명, 녹음 등 분화된 스탭들과 처음 일해본 박명랑 감독은 새로운 꿈을 갖고 있다. “애초엔 전공을 살려 중남미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려 했는데, <메모리즈>와 이 영화를 거치면서 창작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됐다.” 6월 초부터 LA필름스쿨에서 1년짜리 코스를 밟으려는 것은 영화로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데 따른 불편 해소 차원이다. “장르적이지 않은 코미디, 또는 애매모호한 유머”에 소질을 느끼며, (당연하게도)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그는 친구들이 붙여준 가명(본명은 박종혁)처럼 ‘명랑감독’이 돼 1년 뒤 돌아올지 모른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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