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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포럼 2003에서 발견한 감독들 [3]
문석 2003-06-05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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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없는 이야기>의 김진곤 감독

쉿! 지금부터 김진곤 감독이 속사포처럼 늘어놓는 이야기에 주목하시길. “김구선생의안경은원래다른사람의것이었는데이토히로부미가쓰던것이었다안중근의사가하얼빈에서이토히로부미를암살할때김구선생이그자리에있었다는사실을알고있었나그때이토히로부미가떨어뜨린안경을김구선생이주웠다(…이하 생략).” 이후의 출연진도 빵빵하다. 이시영 선생, 이종찬, 헤겔, 후쿠자와 유키치, 구텐베르크, 정약용 등등등. 아차, 이 영화를 <역사스페셜>로 오해하면 안된다. <제목없는 이야기>는 역사를 빙자해 크게 ‘뻥’을 치는 영화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대반전은 가히 <유주얼 서스펙트>급이다. 믿거나 말거나….

역사, 거짓말, 그리고 내러티브 역사 마니아이거나 능청맞은 이야기꾼, 분명히 둘 중 하나일 거라는 예상은 들어맞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실(史實)들의 진위 여부를 묻는 질문에 김진곤 감독은 태연하게, 그리고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답했다. “당연히 대부분 거짓이다. 이 영화를 위해 읽은 역사책도 없다.” 그러니까 김구 선생이 안중근 의사와 함께 하얼빈 역에 나간 적도, 헤겔이 자신의 안경을 ‘미네르바의 부엉이’라고 명명한 적도,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을 돌면서 근대 권력이 깃들었다는 이 안경을 손에 넣은 적도 없다는 이야기다. 아니,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의 상상과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뿐이다.

그가 이 이야기를 꾸며내기 위해 의존한 것이라면 인터넷뿐이다. 인터넷에서 역사적 사실을 취합해 자기 마음대로 얽었다는 것. 김구 선생이 해방 전에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가 해방 뒤 안경을 쓰고 나타난다는 영화 속 ‘주장’ 또한 거짓말인데, 그는 이를 위해 인터넷에서 김구 선생 사진을 여럿 다운받았고, 해방 전 사진에서 안경 안 쓴 것을, 해방 이후 사진에서 안경 쓴 것을 추려내 ‘논거’로 제시했다.

그가 나름의 치밀함을 기울이면서까지 거짓을 설파한 이유는 뭘까. “내러티브와 이야기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뻔한 이야기 구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한마디로 기존 이야기 구조에 개겨보고 싶었다.” 영화 속에서 감독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계속 이야기하는 형식을 택한 것이나 거짓된 사실을 논하는 것은 이런 의도에서 비롯됐다.

근대성, ‘어처구니없는’ 그가 내러티브 구조에서 벗어나려 했던 이유는 근대성의 미망을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과 이야기는 그의 뜻이 뭉근히 배어난다. 김구와 안중근은 근대성을 강제한 외세에 맞섰던 인물들이고, 이토 히로부미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 세력이며, 구텐베르크, 헤겔 또한 근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또 근대화를 ‘욕망의 보편화 과정’으로 정리하는 후반부에 이르면 감독의 의도는 명확해진다. “이야기란 게 꽉 막힌 구조잖냐. 그 막힘의 이면에는 이성과 합리성이 있을 것이다.” 영화 중간중간 판소리를 집어넣은 것도 비슷한 맥락. “판소리의 이야기는 뻔하지만 창자(唱者)의 행위에 따라 다른 재미와 설득력을 제공한다.”

사실 그가 보기에 이런 의도는 충분히 성공을 거둔 것 같진 않다. 이 영화 또한 근대적 이야기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이 영화의 결말은 웃음과 함께 일종의 반성을 촉구한다.

아쉬웠던 일 한 가지. 그는 올해 초 KBS2TV <독립영화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 영화를 만우절에 맞춰 방송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믹싱과 편집을 새로 했건만, 결국 <제목없는 이야기>는 방송을 타지 못했다. 김구 선생을 ‘출세욕으로 똘똘 뭉친’ 인물로 묘사한 게 문제였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픽션을 픽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또한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로맨틱코미디와 멜로, 인물을 똑바로 보련다 연세대 국문학과를 나와 영상원에 들어간 지 4년째를 맞는 김진곤 감독은 현재 졸업작품을 고민 중이다. 내러티브에 관해 여전히 스트레스를 느끼지만, 일단 <제목없는 이야기>를 통해 욕구를 해소한 터라 요즘의 관심은 인물에게로 꽂혀 있다. “서사방식이나 구조보다는 캐릭터 위주의 이야기를 쓰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좋아하는 영화가 로맨틱코미디와 멜로영화이다 보니 더더욱 인물에 대한 강조는 중요하다. 앞으로 “스스로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그는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게으른데 눈은 높은” 자신의 성격과 어떻게 조화시킬지 목하 고민 중이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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