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매트릭스

예전에도 가끔 그런 기억이 있다. 특히 봄철에, 몸속의 혈관들을 따라 한창 물이 오르느라 왠지 피부가 근질거리는 그런 봄철에, 유난히도 어지러운 꿈을 많이 꾸었다. 깨어나면 꿈의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면서 세상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이 낯선 남자가 내 남편이란 말이야? 내가 두 아이의 엄마라니, 맙소사! 직장에 가면, 어제까지 다정했던 동료가 갑자기 발톱을 세운다. 역시 이 도시는 내가 살기 부적절한 것 같아. 이 살풍경한 곳에서 참 오래도 버텼군. 공기에서도 수돗물에서도 인공의 냄새가 난다. 인공의 냄새는 내 몸 안에서도 난다. 언제부턴가 내 안에 어떤 장치가 침입해서 주로 머리와 가슴 사이를 오가며 작동하는 게 느껴진다. 이 장치는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 같다. 내 자신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내가 누구지?

이따금씩 이상한 꿈을 꾸지만 않는다면 내 생활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깨끗하고 현대적인 건물에서 잘 차려입은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한달에 한번씩 규칙적으로 지급되는 보수로 쇼핑을 하고 여행도 하고. 게다가 조직이 원하는 고효율 인간으로 평가되면 남보다 빨리 승진도 한다. 고효율 인간답게 근면성실 분골쇄신 일취월장한다. 나는 남들에게 충고 반 협박 반으로 이런 말을 한다. “고부가가치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 “너도 흑자 인간이 돼보란 말이야.” 간혹 이런 말을 하는 내 자신이 너무도 낯설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보기도 한다. 이상하기도 하지. 내가 바탕은 인본주의자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인간’이란 말에 ‘고부가가치’나 ‘흑자’ 같은 단어를 묶어서 쓰다니. 인본주의자라면 그럴 수는 없어. 그러면 나는 더이상 인본주의자가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인본주의자로 하여금 엉뚱한 발언을 하도록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는 걸까. 혹시 내 판단과 욕망을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 또다시 내 자신이 낯설어진다. 내 안에 어떤 장치가 들어와서 암약하고 있다는 심증이 굳어진다.

어떤 영화를 보았더니 등장인물 한 사람이 선지자 같은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선택은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심어준 환상일 뿐이다.” 이런 말도 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원하는 게 뭔 줄 아나. 더 많은 권력이지.”

적의에 찬 세계 속에 홀로 던져진 현대인은 고독을 견디다 못해 자아를 상실하는 길을 택한다는 어떤 사회심리학자의 주장이 생각난다. 그는 이런 말도 했지. “우리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바란다고 기대되는 것을 바라고 있는 데 불과하다. 사람이 진정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누구나가 해결해야 할 가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다.”

가만히 되짚어보니 모든 게 그 지겨운 IMF 이후 몇년 사이의 일이다. 조직의 중앙의 중앙의 중앙에서 누군가 이 사회시스템을 굴려가는 엔진의 기어를 두 단계쯤 올려놓은 게 틀림없다. 생존의 조건이 부쩍 각박해졌다. ‘저부가가치 인간들은 나이 오십 되기 전에 사회에서 쓸어버려야 해.’ ‘여기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려면 너의 능력을 보여줘.’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경쟁력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이 사회가 지겹다.

나도 언젠가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 사이에 선택을 한 적 있는 것 같다. 빨간 걸 먹으면 다 잊게 돼. 자신이 누군지, 이 사회가 뭔지, 다 잊고 편하고 즐겁게 살 수 있지. 하지만 파란 걸 먹으면 끝까지 가는 거야. 아마도 나는 빨간 알약을 선택한 것 같다. 하지만 약발이 잘 안 듣는지 부작용 탓인지 아직도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위너들에겐 판타스틱하고 루저들에겐 가혹한 세상이 나는 가끔 낯설게 느껴진다. 그럴 땐 연공서열 시스템이 차라리 안락하다고 느낀다. 나이 들면 오직 세상을 질기게 살았다는 점만으로 존경받고, 지적 능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은 ‘약자 보호의 원칙’에 의해 대우받고, 약간 모자란 사람이 대충 끼어 있어도 표가 잘 안 나면, 그러면 좋겠다.

어젯밤에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아침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런 내용의 교신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내 위치가 추적당한 모양이다. 본부에서 다급히 날 호출한다. 매트릭스를 빠져나와 빨리 시온으로 복귀하라는 신호다. 때르릉. 때르릉. 때르릉. 조선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