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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의 편지
이다혜 2003-06-04

드가와 뜨거운 포옹을 하고 빠삐용은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린다. 야자열매로 만든 자루에 타고 수평선 너머 멀리 사라져갈 때, 스크린 위에서 주인공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영화의 주제곡이다. . 바퀴벌레를 잡아먹는 역겨운 장면, 떠나는 빠삐용을 바라보는 드가의 표정과 함께, 당시 프랑스 감옥의 끔찍함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신곡>의 지옥문에는 ‘이 문을 통과하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씌어 있다. 아무리 끔찍해도 나올 희망이 있다면, 아직 살 만한 곳이다. 그러나 빠져나올 ‘희망’이 없다면, 유황불이 없어도 그곳은 곧 지옥이 된다.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수형자들을 졸지에 빠삐용으로 만들어버리는 법이 있다. ‘사회보호법.’ 이 법에 따르면 이미 형기를 마친 사람이라도 법원에서 재범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다시 ‘감호소’에 가둘 수 있다. 말이 좋아 ‘보호’지 실은 또 한번의 징역살이다. 이 황당한 법이 생긴 것은 전두환 정권 시절. 그때 군사정권은 ‘삼청교육대’를 설치해 운영했다. 수감자들이 교육(?)을 마친 이들이 사회에 복귀할 때가 되자, 전두환 정권은 이 강제수용소의 폭압적 인권유린의 실상이 밖에 알려질까봐 부랴부랴 ‘청송보호감호소’를 만들어 교육생들을 전원 그곳에 수용시켜 관리했다. 이게 그 빌어먹을 법의 탄생 비밀이다.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시계바늘을 뒤돌려 1930년대 독일로 가자.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에서는 1933년에 ‘상습범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바 있다. 이게 ‘사회보호법’의 원조다. 이 끔찍한 발상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우리 사회에 도입된 것은 한갓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게다. 법은 범죄의 ‘사실’을 처벌하는 것이지, 범죄의 ‘가능성’을 처벌하는 게 아니다. 그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또 다른 죄를 짓지 않은 이들의 인신을 구속하는 것은 파시즘국가에서나 있는 일이다.

우리 헌법은 동일범죄에 대해 이중 처벌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보호법은 동일 범죄를 사실상 이중 처벌함으로써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 고약한 것은 헌법재판소에서까지 이 빌어먹을 법에 ‘합헌’ 판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법 진보적이나, 헌재의 판결은 매우 수구적이다. 헌법을 지킨다는 영감들의 마인드가 아직도 5공 시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에서는 감호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흉악범이라 선전한다. 하지만 현재 감호인 중의 73.6%은 절도범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절도’가 흉악범죄였던가?

기가 막힌 것은 법무부의 태도다. 법의 폐지여부를 묻는 민주노동당의 질의에 대한 법무부의 대답. “한꺼번에 내보내면 위험하다.” 이게 대한민국 법무부의 법의식이다. 그런 식이라면 모든 범죄를 아예 종신형으로 다스려야 할 게다. 왜? 전과자들은 어차피 위험할 테니까. 법무부에서는 보호감호가 전과자들의 사회복귀를 돕는 제도라 강변하나, 보호감호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재범률이 어디 떨어지겠는가? 그러니 괜히 사람들 고생시키는 셈이다.

이 악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법무부에서 부랴부랴 대책이란 걸 내놓았다. 그런데 그 대책이 기가 막히다. 감호소를 폐지하는 게 아니라 더 짓겠단다. 2005년까지 300명 규모의 보호감호 시설 서너곳을 더 지을 계획이란다. 그 대신 피감호자의 일당도 올려주고, 가족 면담권, 외부 교통권, 사회견학 등 사회와의 접촉기회도 확대할 거라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교수대의 뻣뻣한 밧줄을 부드러운 실크로 대체해놓고,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극복했다고 자랑하는 격이다.

청송감호소에서 600명의 피감호인들이 지금 단식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이미 네 번째다. 단식에 돌입한 빠삐용들이 감호소라는 이름의 무인도에서 병 속에 편지를 넣어 절벽 아래 바다에 던졌다. 그 편지가 파도를 타고 떠돌아다니다 우연히 내 눈에도 띄었다. “명색이 징역형이 아니고 감호형인데 어떻게 감호형이 징역형보다 못한 제도가 행해지는 건지 정말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억울한 나머지 힘없는 사람의 최후에 투쟁인 단식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저희들의 대변인이 되어주시옵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소망대로 우리가 저들의 “대변인”이 되어주면 안 될까?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