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순풍‥>에서 <똑바로‥>까지,`작가` PD 김병욱 론 [2]

02. 김병욱은 집요하다

“장인어른,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순풍 산부인과> 미달이 아빠) “아버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박정수) “아빠, 너무 해요.”(<똑바로 살아라> 형욱) 김병욱의 인물들은 “너무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은 정말 너무들 한다. 노구와 노주현, 노주현과 형욱 같은 부자지간에 두드러지는 특징이지만 장인과 사위, 시아버지와 며느리처럼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입장이어도 별로 다르지 않다. <똑바로 살아라>의 이응경과 리나 자매를 보라. 억척스런 아줌마 이응경은 동생 리나에게 수시로 돈을 빌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쇼핑 가면 계산하는 쪽도 리나인데다 자기 화장품을 사면서 카드로 사면 5% 할인된다며 동생의 지갑을 열게 한다. 그런데 정작 기가 차는 일은 그 다음이다. 리나가 백화점 카드로 계산하면서 받은 사은품까지 자기 것이라 우기는 이응경. ‘동생은 영원한 내 밥’이라는 그녀의 신념에 찬 행동은 진정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

기실 김병욱의 시트콤은 그들이 ‘너무한다’는 사실에서 빚어지는 소동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 극작의 기본이지만 김병욱의 작품에서 이런 소동은 일회적인 해프닝이 아니다. 캐릭터와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한편으로 김병욱은 누군가 너무한 짓을 했을 때 그 상황의 끝까지 가본다. 보는 이가 “저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할 때까지 극단으로 밀고가면서 코미디는 비등점에 이른다. 일정 온도까지 계속 불을 때면 물이 끓듯 힘없이 피식 웃다가 폭소를 터트리고 만드는 질적전화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어이없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돈 1만∼2만원과 라면 한 그릇에 울고 웃는 상황을 유치한 설정이라 비웃다가도 끝내 배를 부여잡게 만드는 힘은 결국 ‘김병욱이 너무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아마 김병욱 시트콤을 본 시청자들의 공통된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집요하다”일 가능성이 높다. 캐릭터의 특징이든 사건의 연쇄작용이든 김병욱은 일단 물면 놓치질 않는다. 때문에 그의 시트콤은 종종 캐릭터 연구 사례집처럼 보인다. <똑바로 살아라>에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박영규와 안재환이 실은 같은 종류의 인간임을 보여준 에피소드는 캐릭터 탐구의 심층까지 가닿지 않고선 발굴할 수 없는 이야기다. 김병욱은 양파껍질을 까듯 캐릭터의 표피를 하나씩 벗긴다. 양파를 깐다고 무슨 심오한 양파가 발견되겠냐마는 그 과정 자체의 집요함으로 말미암아 김병욱 시트콤의 맵고 달콤한 맛이 우러난다. 사소하게 시작해 나중까지 창대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는 소동이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다.

03. 김병욱은 슬픈 코미디를 만든다.

김병욱의 인물들은 지지리 궁상이다. <순풍 산부인과>의 박영규는 그중 대표선수다. 엄청난 식탐의 소유자 영규는 절대로 돈내는 법 없는 잔똘이기도 하다.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돈에 쪼들려 눈칫밥 먹는 풍경은 가관이다. <똑바로 살아라>에서도 영규는 비슷한 인물로 나온다. 그가 우연히 옛사랑을 만나 양수리에 놀러갔다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김병욱 시트콤의 명편 가운데 하나다. “돈있는 놈들이 바람 피운다”며 설움과 울분을 토하는 영규를 보노라면 웃기는 한편으로 가슴이 아프다. 김병욱이 만드는 비애가 있는 코미디는 종종 캐릭터의 약점을 매력으로 바꿔놓는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며느리 박정수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다. 시아버지의 호통을 귓등으로 흘리는 며느리가 어느 날 둘째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애교떠는 모습을 보며 따라한다. 콧소리를 섞어 “아버님” 하고 부르는 박정수의 안간힘은 폭군 같은 시아버지한테도 사랑받고 싶은 며느리의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어 코끝이 시큰해진다.

김병욱은 웃음이 슬픔을 머금을 때 아름다워진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언제나 상반된 가치가 부둥켜 안고 있는 기괴한 풍경에 머문다. 형부의 돈을 떼먹고 딸의 컴퓨터를 사주려는 이응경의 모습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뭉클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가족 이기주의와 지극한 자식 사랑은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하다. 김병욱 시트콤에는 사람들의 속물근성과 이중성을 조롱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시청자의 폐부를 찌르거나 양심을 일깨우는 식으로 진행되는 법은 별로 없다. 당연히 개과천선하는 인물도 없고 갈수록 미운 짓만 하는 인물도 없다. 그는 다만 우리 중 누구도 잘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만든다. 김병욱의 인물들은 속물근성과 이중성을 골고루 나눠갖고 있다. 김병욱이 스스로 “냉소의 코미디, 아웃사이더의 코미디, 힘이 없는 코미디”라고 부르는 대목은 여기일 것이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 오해가 녹아 화해하는 과정을, 웃음이 녹아 슬퍼지는 풍경을.

<똑바로 살아라> Best 에피소드너 자꾸 그러면 커서 흥수 된다!

‘생활영어’ 편

두 인물이 부딪힐 때 발생하는 독특한 양상의 갈등은 현재 140회분을 방영한 <똑바로 살아라>의 주무기다. 영규-재환, 재환-리나, 리나-응경 등 <똑바로 살아라>의 많은 듀엣 중 최강으로 꼽을 만한 커플 중 하나는 노주현-노형욱 부자. 민정에게 영어를 배우는 형욱의 성적이 나아질 기미가 없자 아빠는 폭발한다. 그리고 집에서 형욱과 대화할 때는 영어만 쓰라는 엄명을 내린다. 그러나 긴급조치의 희생자는 노주현 본인. 재떨이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한영사전을 뒤지고, 전구 갈아끼우라는 말을 “아이 니드 파이어”라고 갖다붙이지만, 결국 의사소통은 몸짓으로 한다. 급기야 남들은 외계인의 대화인가 싶은데 두 사람만 통하는 경지에 이른 부자. 그러나 게임방의 외상값 독촉 전화는 파국을 부른다. “게임룸 콜 미. 와이 유 머니! 와이! 와이!”(게임방에서 전화왔다. 너 왜 돈을!) “노 미. 마이 프렌드.”(제가 아니라 제 친구가요) “유 배드 유 베리 배드 보이. 아웃! 유 아 낫 마이 선.”(이 나쁜 녀석, 나가! 넌 내 아들도 아냐) “아임 유어 선.”(전 아빠 아들이에요) “아웃”(나가!) 영어를 활용한 농담은, 이응경의 홈스테이, 노주현의 영어드라마 촬영사건 등으로 이어진다. <똑바로 살아라>에서 영어는, 딱히 외국어라기보다는 개인의 숨은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특별한 한국말 사투리에 가깝다.

‘흥수라는 단어’ 편

캐릭터가 곧 스토리가 될 수 있다는 잠언을 증명하는 에피소드. 20여분 동안 덜렁거리고 실속없고 아는 것 없는 흥수의 면모를 갖가지 사건을 나열하며 보여준다. 일련의 사태를 곁에서 꾸준히 지켜본 혜진은 “흥수 오빠의 이름은 언젠가부터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진 하나의 단어가 됐다”라고 정리한다. 흥수라는 낱말의 용례를 보여주는 예문은 다음과 같다. 1) “왜 그래, 네가 흥수냐?”(=왜 철없이 그런 장난을 치니?) 2) “어이구 이 흥수야, 그것도 모르냐.”(=너 진짜 무식하구나) 3) “아야! “왜 안 하던 흥수짓을 해?”(=왜 오버하고 난리야?) 4) “킹카가 너 찍었대. 좋겠다.” “혹시 흥수 아냐?”(=키만 컸지 별볼일 없는 애 아냐?) 5) “나 예전엔 사람들 앞에서 말 잘했는데 거의 흥수됐어.”(=긴장하면 버벅거려) “죽어라, 임마.”(<심슨 가족>의 호머 심슨은 한때 사전에서 ‘멍청하다’는 단어의 정의로 사진이 실린 적이 있다)

‘민정의 완전범죄’ 편

노주현의 둘째딸 민정은 팬시상품 캐릭터 ‘타레판다’마냥 대체로 자고 있다. 또한 깨어 있는 시간에도 일반인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꿈을 꾸는 것처럼 보인다. 밀림의 왕자가 사자냐 호랑이냐 싸우는 언니와 동생에게 “밀림의 왕자? 아나콘다 아니야?”라고 반문하는 민정의 상식과 반사신경은 정녕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아빠에게 거짓말하고 흥수와 동해일출을 보고 온다는 완전범죄 계획을 세운 민정. 처음부터 큰소리로 통화를 해 언니에게 들키고 대로에서 택시를 잡아 동생에게 들킨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꼬리를 밟힐 때마다 민정의 반응은 (여전히 웃으며) “와, 눈 되게 좋다. 쇼킹 쇼킹”이 고작이다. 그러나 신은 그녀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흥수와 큰소리로 경포대 카페 이야기를 할 때는 아빠가 귀에 들어간 물을 빼는 중이고, 낙산사에서 민정이의 태평한 인사를 받은 아빠 친구는 공교롭게도 입을 덴다. 마침내 저녁뉴스에 등장한 민정. “남자친구와 오길 잘했어요”라고 생글거리며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악으로 굳은 식구들이 고개를 돌리면 노주현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