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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에서 <똑바로‥>까지,`작가` PD 김병욱 론 [3]
김혜리 2003-05-30

04. 김병욱은 배우를 발견한다

김병욱 시트콤은 하루 100신을 찍는 속도전이다. 주 5회분을 이틀에 나누어 찍는데 노주현 집을 배경으로 하루, 박영규 집을 배경으로 하루를 찍는 식이다. 이만하면 충무로의 전설인 빨리찍기 권위자 남기남 감독 못지않은 스피드다. 그러나 녹화 당일 자정에 대본을 받아든다는 배우들의 연기는 수준급이거나 적어도 편집이 구획 지은 리듬 안에서 자연스럽다. 실제로 김병욱 시트콤을 통해 오지명, 노주현, 신구, 박영규, 선우용녀를 비롯한 중견배우들은 대중에게 새로운 레퍼토리를 보여주고 안재환, 서민정, 노형욱 등 젊은 연기자들은 잠재력을 꽃피웠다. 가만히 앉아서 눈썹만 꿈틀해도 설득력을 발휘하는 베테랑 연기자들의 공력 덕택이기도 하지만 연출자의 밝은 눈과 용병술을 빼놓고는 성공의 비결을 이야기할 수 없다.

연기를 끌어내는 김병욱 PD의 기본적 방법론은 ‘투사’(投射)다. 대본을 읽히는 대신 “무엇을 좋아하냐”, “비는 시간에는 뭘 하고 지내나” 같은 일상적인 인터뷰를 거쳐 캐스팅을 결정하는 그는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연기자가 갖고 있는 변할 수 없는 핵심을 체크해서 극중 인물의 재료나 불가결한 조미료로 쓴다. 얼핏 보기에 사소하지만 한 인간의 퍼스낼리티에서는 그의 연기 철학이나 외모보다 중대할 수 있는 자질을 브라운관에 끌어내는 것이다. 원래 자기 안에 있던 것이니 연기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편할 수밖에 없고 대단한 준비와 훈련 시간이 허락될 턱없는 일일극의 조건에서도 최선의 선택이다.

김병욱 시트콤의 연기 발굴력은 단지 미남 미녀가 망가진다는 신기함 이상이다. 미모 때문에 애정관계가 얽히고 설키는 드라마에 자주 출연했던 이응경을 만나본 사람들은 “연예인이 되기엔 너무 조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비상식적으로 예쁘지만 상식적인 감수성을 갖고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이응경은 <똑바로 살아라>에서 미인이지만 자기 미모에 무심하고 가계부 수지 맞추기에 열정적인 아줌마로서 편안한 연기를 보인다. 다른 드라마에서 그늘진 사랑이나 청승맞은 피해자 역에 묶여 있던 홍리나는, 여성스러운 외모와 목소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자화상에 맞춰 연극적인 포즈로 살아가지만 때때로 삑사리를 내는 귀여운 노처녀로 얄미움과 귀여움 사이의 미묘한 적정선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연배의 신세대 탤런트들과 구별되는 이동욱의 서늘한 눈빛, 김흥수의 순발력도 <똑바로 살아라> 전에는 목격자를 갖지 못했다. 김병욱 시트콤을 보고 있노라면 출연배우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진실의 일단을 본 듯한 느낌을 갖는다.

요컨대 김병욱 PD는 캐릭터는 수정할 수 있지만 사람을 바꾸기는 힘들다는 현실을 수긍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소극적’ 전략의 결과는 짐작 이상으로 훌륭하다. 그뿐 아니다. 김병욱의 시트콤을 매일 무심코 지켜보다 보면 어느 날 거울 속의 내가, 식탁 건너편의 가족이, 옆자리의 동료가 하나의 캐릭터로 보이기 시작한다. 김병욱은 나도, 우리도 뜯어볼수록 흥미로운 캐릭터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힘을 지닌 작가다.

05. 김병욱은 상실의 노래를 부른다

김병욱은 게임을 즐기는 화목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거나 수업을 열심히 듣는 편도 아니여서 야간자율학습 시간 3시간은 몽땅 공부해야지, 마음먹는 데 썼다고 한다. 집에서 혼자 노는 걸 즐기는 몽상가 김병욱은 어쩌면 시트콤에서 자신이 유년기에 관찰했던 풍경을 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틈만 나면 고스톱을 치고 모이기만 하면 게임을 즐기는 김병욱 시트콤의 가족이 그 증거지만 김병욱 시트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장난꾸러기가 많았던 교실 풍경이 떠오른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올라타는 일이 스스럼없었고 준비물이 안 갖고와서 당황했고 선생님에게 혼날까봐 노심초사했던 시절, 오해도 많고 다툼도 빈번했으며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됐던 그날들이 어른의 세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김병욱 시트콤의 사실적인 표현 뒤에 감춰진 노스탤지어는 이 드라마의 가족과 동료가 우리가 소망하는 판타지일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한다. 라면 한 그릇에 서러워해도 충분히 이해받던 그 때를, 프랑크소세지를 잘라 윷놀이를 해도 부끄럽지 않던 옛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김병욱의 코미디가 얼핏 유아적인 인상을 풍기면서도 한없이 너그럽고 부드러워 보이는 이유는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누군가 너무한 짓을 저질러도 법과 제도가 끼어들 필요가 없었고 돈과 권력도 인간의 표정을 잃지 않았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마지막회를 떠올려보라. 어머니의 죽음이 그토록 슬픈 이유는 단지 갑작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카메라는 어머니가 떠난 빈집을 비춘다. 영삼이는 열심히 공부하고 아버지는 가끔씩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며 할아버지는 다른 할머니를 만나고 있다. 그들은 변함없는 일상을 살지만 우리는 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으리라. 가족이 함께 즐기는 게임과 할아버지의 불호령과 아버지의 잔소리가 삶이 가장 빛나던 시기에 울리던 찬가였음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다시 그날을 맞기 너무 늦은 때이다. 김병욱은 시트콤에서 그렇게 다시 오지 못할 시간을 호출한다. 당신은 김병욱의 시트콤에서 당신이 그리워하던 것을 보고 있다.남동철 namdong@hani.co.kr·김혜리 vermeer@hani.co.kr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Best 에피소드스님, 열라 멋져요!

‘스님들의 개인기’ 편

만년 소방파출소장 노주현의 승진시험에 가족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런데 평소 엄청나게 둔하던- 그는 장이 파열된 것도 모르고 한참 생활한 전력이 있다- 노주현이 책상에만 앉으면 소음에 민감해져 집중을 못한다. 결국 보따리를 싸서 절에 들어간 주현. 심심함을 못 견디던 차에 충선 스님에게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 보여주기를 조른다. “한번만 보여주세요.” “별것 아닙니다.” “제발, 한번만.” “주지 스님 아시면 불호령 떨어집니다.” “주지 스님 안 계시잖아요.” “할 수 없지요, 그럼.” 느닷없이 막대 밑을 통과하는 림보를 보여준 스님은 합장한다. “나무관세음보살.” 주현은 충선 스님이 추천한 득심1 스님을 조르고 스님은 역시 사양 끝에 암기 재주를 보여준다. “정 그러시면, 1호선 노선도를… 독산, 가리봉, 구로, 신도림, 영등포, 신길….” 감동하는 노주현. 다시 다른 두명의 스님을 찾아가 조른다. 사양하던 스님들은 눈빛을 교환한 뒤 입을 연다. “그 아가씬 언제나 요들레이 히에히에….” 갑자기 등장한 주지 스님이 호통을 친다. “제가 요들송 부르지 마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속세에서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던 두 스님은 고개를 조아리고 시줏길을 재촉한다. 똑같은 시추에이션이 점층 반복되는 것은, 김병욱 시트콤의 오랜 공식. 최근에는 좀더 복잡한 각본을 선호해 일주일에 2회 정도만 활용된다. 어이없는 개인기, 무료함에 지친 노주현의 과도한 감동,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삼 박자가 웃음의 강도를 점점 높인다.

‘홍렬의 일기장’+‘음식으로 게임하기’ 편

종옥이 홍렬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에피소드와 낚시터에 갔다가 폭설로 고립된 노구, 노주현 부자가 음식물을 도구로 활용해 놀이문화를 창달하는 에피소드를 묶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좀처럼 해주지 않는 종옥에게 투정부리며 여행 떠난 홍렬. 놀러온 정수의 부추김에 넘어간 종옥은 홍렬의 일기장을 몰래 읽으며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발견한다. 정갈한 웃음을 잊지 못한 첫 만남, 우연인 척 종옥의 생일을 챙긴 이야기, 아픈 종옥을 돌보러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형수 눈에 띄지 않게 집을 빠져나가느라 거실 구석 이불빨래 속에 숨어 네 시간 동안 ‘미세하게’ 이동해- 마치 꽃이 피는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탈출한 무용담 등등. 짝사랑의 심경 묘사에 있어 평균치의 멜로드라마들을 능가하는 김병욱 시트콤의 손끝은 <순풍 산부인과>의 혜교와 영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홍렬, <똑바로 살아라>의 동욱으로 이어진다. 홍렬 부부가 사랑을 확인하는 동안, 노구 부자는 프랑크 소시지 윷놀이, 풋고추와 달걀을 이용한 볼링 등으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보람차게 지낸다.

‘엄마의 죽음’ 편

“세상의 절반은 슬픔”이라고 믿는 김병욱 PD는 삶의 정해진 반쪽만 담게 마련인 시트콤의 통상적 행동 반경을 종종 벗어난다. 하지만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최종회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행보로 파란을 일으켰다. “요즘 이상하게 아랫배가 아프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박정수는 증세가 악화되자 남편 노주현과 병원을 찾는다. 집에서는 각고 끝에 승진한 노주현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려 모두 모이지만 주현은 정수의 검사결과를 받으러 간다. 포복절도하는 추억담을 꽃피우는 잔칫상에 도착한 주현은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우리 주말에 다같이 여행이나 가자.” 조카딸 민정의 내레이션은 큰엄마의 죽음 이후 삶의 한 계절을 떠나보낸 집안 식구들과 이웃들의 후일담을 들려준다. 실은 오랫동안 이런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듯, 좀더 나이든 사람들과 아무도 더이상 언성을 높여 싸우지 않는 적막한 집안과 젊은이들이 떠나간 빈방을 돌아보는 카메라가, 누구보다 웃기 좋아하는 이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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