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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에서 <똑바로‥>까지,`작가` PD 김병욱 론 [6]
김혜리 2003-05-30

5월이었다. 만물이 푸른 빛을 틔워야 당연한 계절이지만 황사로 뒤덮인 을씨년스런 홍은동의 하늘은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는 듯했다. “아∼ 짜증나∼ 짜증나. 이 동네 진짜 후진 거 있죠. 아이씨, 이제 동욱이 오빠도 없고…. 어떻게 재밌는 일이 없어도 이렇게 없냐….” ‘주현정형외과’에 옹기종기 모여 햄버거를 씹어대던 간호사 려원과 물리치료사 흥수는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턱’이 있나. 미친 매미만이 날짜 계산 못하고 튀어나와 울어젖히는, 초여름의 한가로운 오후일 뿐이었다.

“정 간호사! 이게 무슨 소리야?” 골룸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던 흥수의 긴 몸이 한순간에 쭉 펴지면서 창문가로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창문 너머 북서쪽 방향에 먼지를 동반한 강한 회오리바람이 인다. “아! 뭐야? 짜증나…. 또 공사해? 또 공사해?” “잠시만 조용히 있어봐, 정 간호사. 이건 공사장 먼지바람이 아니야.” 순간 바람이 잦아들 때쯤 태양을 뒤로 하고 한 여자가 등장했다. “다… 당신은….” 흙먼지에 뒤덮인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손, 그 손에서는 누구도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을 한번 잡으면 절대 놓지 않겠다는 욕심과 집착으로 똘똘 뭉친 강인한 손을 가진 여자. 3년 전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 전설이 돼버린 사람. 그렇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박· 미· 달. 홍제동의 핵,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던 사악한 어린이. 박미달이 ‘탄알일발재장진’한 상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를 이제 미달 리로디드(Midal Reloaded)라고 불러라!”

미달 리로디드 한때 박미달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불렸지만 3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여전사 ‘미달 리로디드’로 재탄생했다.

노구 | 매일 장롱에 다리 올리고 누워 있는 자세를 선보임으로써 허릿병이 생겨 주현정형외과에 입원 중. 몸에 좋은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영감으로 땡깡에서는 미달과 막상막하.

노민정 |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반달로 만들며 웃는다. 가끔은 형욱과 장소팔·고춘자 같은 2인 만담조로 변신한다.

올드보이? 헤헤헤, 알려줄까?

“나를 이제 ‘미달 리로디드’라고 불러라!” 풍문을 통해 익히 미달의 괴력을 들어왔던 흥수는 이제 겨우 한입밖에 못 먹은 햄버거를 먼저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저… 그런데 저희 병원엔… 무… 무슨 일이세요? 어디 디스크라도….” “어이, 흥수씨, 왜 그렇게 쫄고 그래? 저 여자 누구야? 와! 되게 못생겼다. 옷은 덥게 저게 뭐야, 공짜로 얻어입었나봐. 진짜 깬다….” 미달 리로디드가 쫑알거리던 려원을 한번 무섭게 노려보자 려원은 그 자리에서 녹아버렸다. “허걱!… 장난이 아닌데….” 그때 갑자기 문을 열고 발랄한 발걸음으로 민정이 들어온다. “어! 민정스∼.” 반가워하던 흥수의 얼굴이 이내 굳어진다. “야! 빨리 돌아가, 여긴 위험해.” “헤헤헤, 왜 이려셔, 뭐가 위험해. 나 놀리려는 거지? 어? 근데 누구세요?” “산만한 것들! 시간이 없다. 어서 빨리 나를 도와라.” “어머 이 말투는… 혹시 성유리 아냐? 아니다 아니다. 성유리가 이렇게 생겼을 리 없지. 헤헤헤.” “나를 삼년 동안 어둠의 세계에 가둔 건 K란 자라고 들었다. 이제 복수만이 남았을 뿐이야!” “복수? 복수는 양동근 아닌가? 아닌가? 아니다. 그러면 박찬욱 감독 인가? 아닌가? 그러면 <올드보이>인가? 아닌가? 올드보이? 아하! ‘노구’(老軀)할아버지구나. 그 할아버지 121호 방에 누워 있는데. 헤헤헤….”

민정의 부친인 노주현의 친아버지인 노구는(아… 복잡하다) 매일 장롱에 다리올리고 누워만 있던 버릇 때문에 1년 전 허릿병이 생겨 주현정형외과에 입원했다. “니들이 양갱맛을 알어?” 이 영감은 문병객들이 사다주는 백도, 황도통조림과 복숭아 넥타, 그리고 미니약과와 양갱을 얻어먹는 재미에 홀딱 빠져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입원 중인 문제환자다. 특히 과거 미달이 사용했던, 떼쓰기, 고래고래 고함치기, 엉덩이 쑤시기, 독기 품고 달려들기, 발기발기 찢어대기 등의 비법이 담긴 비서(秘書)를 발견해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할아범, 할아범이 내 지난 3년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아! 시끄러, 이리줘, 내 양갱. 뭐 이렇게 생긴 애가 다 있어. 내 참 살다보니 이렇게 못생긴 여자애도 다 보네.” 남들 눈 아랑곳없이 먹는 데 집착하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미달은 흡사 과거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아이들인지 저런 사악한 영감을 조부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타.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인자한 분이셨는데….”

김병욱 | ‘시스템’이라고 불린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이상야릇한 인물들의 창조주로서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한때 ‘세친구군단’ 등의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결코 시스템의 자리를 뺏기지 않았다. 웬만해선 그 순풍을 똑바로 막아낼 수 없는 무서운 인물.

오지명 | 미달의 회상과 판타지에 등장. 미달의 기억 속에는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진짜 성격과 다르게 착하고 용돈 잘 주는 자상한 할아버지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용녀 | 간간이 등장해서 특유의 콧소리 섞인 “아이∼몰라 몰라 몰라아~”를 선보이고 사라진다.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인자한 분이셨는데….”

미달 리로디드의 눈이 어느새 촉촉해지면 즐거웠던 과거로 돌아간다. “용녀! 용녀! 용녀! 하… 그거 무지하게 빠르네.” “아이∼몰라 몰라 몰라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판에서 노닐 때 미달과 영규, 미선은 나무그늘 아래서 피크닉바구니를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오지명은 지갑을 꺼내 1만원짜리 한다발을 미달에게 건네고 볼에 뽀뽀를 한다. “아껴쓰지 말고 펑펑 써~.” “… 펑 펑 써, 펑 펑 펑….” 그러나 미달의 따뜻한 환상은 ‘펑’하는 소리와 함께 깨진다. “속지마! 그건 시스템이 니 머리에 저장시킨 외곡된 기억이야! 오지명 영감은 너를 미워했어!” “넌 누구냐?” 바바리코트와 선글라스 속에 자신을 감춘 남자는 안타까운 눈으로 미달을 바라보았다. “정배? 정배로구나!” 심히 소심한 어린이로 기절을 즐겨하던 소년 정배는 “맙소사“라는 감탄사와 함께 이마를 한번 치고 넘어지는 것으로 동네 아줌마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나 미달에게만큼은 늘 뒷전이었다. 늘 의찬만을 바라보던 미달의 시선 뒤에는 그녀만을 응시하던 정배의 안타까운 시선이 엇갈리고 있었다. “미달, 앞으로 니 눈에 보이는 것, 니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아무것도 믿지마, 아무도 믿지마.” “시스템? 시스템이 뭐야? 넌 뭔가를 알고 있는 거지?” 그러나 정배는 순식간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모든 광경을 반달눈으로 바라보던 민정이 끼어든다. “저기요, 제가 혼자서는 좀 도와드리기가 힘들구요. 제 동생들이 좀 잔머리를 많이 굴리거든요. 걔들이라면 뭔가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거든요….”

“뭐냐? 죄수방이더냐?” 미달은 나무문에 교도소 감방처럼 작은 들창이 달려 있는 형욱의 방문을 열였다. 노주현의 눈을 피해 인터넷 음란사이트에 접속 중이었던 형욱과 영삼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게 아니구요, 제가 원래 이걸 볼려던 게 아니라, 민정이란 이름으로 이메일이 와서 누나가 보냈나보다 하고 열어보려는데 이게 갑자기 창이 계속 뜨는데 계속 닫아도 또 나오고 닫아도 또 나오고…그런데… 누구세요?” 그때 미달의 몸은 부웅 날아올라 360도 회전을 해 컴퓨터 모니터를 창문 저 멀리로 날려보냈다. “이런! 아이들이 보아서는 아니 될 것들을 보다니, 이런 건 싹부터 잘라야 해!”

순간 형욱과 영삼의 입은 떡 벌어졌다. 지금껏 고작 매트 위에서 엉덩이로 뛰어다니는 공중부양 2단계만을 보아왔던 형욱에게 아무런 도구없이 공중부양을 선보이는 미달 리로디드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비추어진것이다. “당신이 말로만 듣던 그 미달 리로디드! 그래! 이제 히딩크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 내 인생 후반전을 바치겠어요!” “앗싸! 나도 내 진정한 스승을 찾았어! 아뵤오오~~.” 미달을 향한 형욱과 영삼의 눈은 ‘하늘만큼 땅만큼’ 넘치는 존경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정배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비밀요원. ‘맙소사’라는 감탄사를 주로 사용한다.

노형욱 | 히딩크의 열성신자. 뭐든지 축구에 빗대어 표현함. 그러나 미달 리로디드의 카리스마에 빠져 결국엔 히딩크를 버리게 된다.

노영삼 | 상하가 붙은 노란색 이소룡 체육복과 쌍절곤을 달고 산다. 이후 이복형제인 형욱, 민정과 합체, ‘바보 3인방’을 이루어 미달 리로디드의 심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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