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마, 현실이 될지도 몰라
<엘리펀트>(The elephant) | 감독 구스 반 산트 | 경쟁부문
구스 반 산트의 영화는 결국 미국 십대들을 이해하려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영화이다. 그가 인디펜던트로 만들건(<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아이디호>), 할리우드에서 만들건(<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 마찬가지이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거나(<카우걸 블루스> <싸이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루기도 하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로 돌아온다. 물론 그의 영화가 점점 나빠진 것은 사실이다(얼마 전까지 나는 <드럭스토어 카우보이>가 그의 가장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굿 윌 헌팅>을 본 다음에 더이상 그의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펀트>로 구스 반 산트는 기적처럼 돌아왔다(아직 나는 <게리>를 보지 못했다). 정말 이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새로운 경지이다. 이제까지의 그의 영화의 결산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영화의 단계에로 점핑한 것이다. 거의 숨이 멎을 듯한 첫 장면의 아름다움. 그리고 거기서 숨을 들이쉰 순간 마지막 장면까지 홀린 듯이 달려간다.
텅 빈 파란색 하늘. 미국의 평범한 고등학교. 영화에는 일곱개의 자막이 나오고 한명씩 소개한다. ‘존’ 존은 알코올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괴롭다. 그는 학교에도 아버지를 차에 싣고 가서 어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내려야 한다. ‘엘리아스’ 엘리아스는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이다. 그래서 학교 미식축구선수 조단과 애인 캐리를 산책로에서 찍는다. ‘조단과 캐리’ 조단과 캐리는 구내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에릭과 알렉스’ 에릭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몇번이고 반복해서 친다. 알렉스는 그의 친구이다. 알렉스는 컴퓨터 게임에 심취해 있다. ‘미쉘’ 미쉘은 그녀의 체육복 때문에 학교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는다. 그녀는 학교에서 왕따이며, 학교 도서실에서 사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브리트니와 니콜, 아카디아’ 브리트니와 니콜과 아카디아는 단짝이다. 남자애들에게 관심이 많고, 학교에서 재수없는 여자애들을 왕따시키고, 점심을 먹고 나면 셋이서 화장실에 몰려가 다이어트를 하느라 토한다. 그리고 ‘베니’ 이 학교의 흑인 소년.
구스 반 산트는 이들을 돌아가면서 보여준다. 시간은 어느 하루의 오후 한나절이고, 그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반복된다. 오해하지 말 것. <엘리펀트>는 <라쇼몽>이 아니다. 같은 순간이 반복되지만, 매번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의 시점으로 옮겨간다. 이를테면 엘리아스가 학교 구내에서 존을 찍을 때 그 옆을 달려가는 미쉘의 장면은 세번 반복된다. 한번은 존을 따라가다가 엘리아스를 만난다. 다른 한번은 엘리아스를 따라가다가 존을 만난다. 세 번째는 복도를 뛰어가던 미쉘이 사진을 찍는 존과 엘리아스를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거듭 구스 반 산트는 이날이 특별한 날이 아니라고 보여준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하루. 하지만 그가 (영화적으로) 반칙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첫 번째 존과 엘리아스와 미쉘이 스쳐 지나가고, 존이 운동장으로 나갈 때 에릭과 알렉스는 총과 탄피로 무장하고, 군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스쳐 지나간다. 이미 참살극은 예고된다. 구스 반 산트는 이 이야기를 말 그대로 장님들이 ‘코끼리 더듬듯이’ 구성한다. 이 사건의 실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건은 벌어지고 만다.
<엘리펀트>는 정말 무시무시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무서운 것은 거기서 구스 반 산트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총기를 들고 학교에 등교해서 친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에릭과 알렉스는 평범한 집 아이들이다. 그 둘이 게이 친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살해 동기라고는 설명하지 않는다(이 영화는 호모포비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스 반 산트 자신이 게이이다). 또는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측은한 마음을 갖게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에 등교했고, 그날 거기 있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으며, 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며, 고등학교 폭력을 분석하려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그날 오후가 주인공이다. 화창한 날씨, 기분 좋은 바람, 평범한 고등학교. 구스 반 산트는 거기서 마치 일상생활을 찍듯이 이 끔찍한 학살을 보여준다.
모두 죽이러 떠날 때 에릭은 다짐하듯이 말한다. “제일 중요한 건 말야, 재미있게 해야 하는 거라고.”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의 극영화 버전? 천만의 말씀! 이건 웃자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구스 반 산트는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살인사건을 쿨(!)하게 담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고등학생 등장인물을 뽑은 일이었다. 신문에 광고를 냈고, 3천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그중에서 ‘연기 경력이 없는’ 200명을 추려냈고, 그 다음에는 한명씩 모두 비디오로 찍어가면서 오디션을 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뽑아낸 아이들을 한편의 영화에 담아냈다.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자기의 실명이며, 그들은 자기의 언어와 자기의 표정을 갖고 상황 안으로 들어왔다. 오하이오의 포틀랜드에 있는 (구스 반 산트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촬영되었지만, 동시에 미국 각지에서 몰려온 고등학생 등장인물들이 자기 자리에서 해내는 그 모습은 미국 고등학교의 풍경이다. 구스 반 산트는 그들을 일일이 인터뷰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물을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할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정말 단숨에 찍었다. <엘리펀트>의 촬영일수는 20일이다.
이것을 신기하게도 구스 반 산트는 스탠더드 사이즈인 1.33 대 1의 비율로 손으로 들고 촬영했다(지금 영화의 대부분은 1.85 대 1이거나 1.66 대 1이다). <엘리펀트>의 미학적 쇼크는 여기서 나온다. 이제는 사라진 사이즈. 오직 폴라로이드 카메라에서 볼 수 있는 그 화면 프레임을 끌어들여서 사진의 일상성의 미학으로 그날 오후를 찍는다. 이 낯선 카메라 프레임은 영화를 마치 사진처럼 보게 만든다. 혹은 그냥 간단히 말하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래서 <엘리펀트>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지로 보게 만든다. 또는 총기살인사건을 스틸 사진 찍는 것처럼 촬영한다.
의도적으로 편광필터를 사용해서 반사광을 지운화면은 평면공간처럼 보이고, 망원렌즈와 단초점렌즈, 혹은 약간 굴곡을 만드는 와이드렌즈, 그리고 딥포커스 촬영이 복잡하게 들어가 있지만 거기서 구스반 산트가 노리는 것은 등장인물의 마음이다. 말 그대로 렌즈는 번갈아 등장하는 그 인물들의 마음의 풍경이다. 그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인물들과 함께 걸어다니거나, 앉거나, 뛰거나, 멈춰서면서 함께 숨을 쉰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는 결코 폭력(의 상황)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래서 총격전의 순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떤 흥분도 피한다. 그는 정작 총격전 장면이 벌어질 때 단초점렌즈로 총을 쏘는 알렉스와 에릭만을 보여주고, 그들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친구들을 모두 아웃 포커스시키거나 프레임 아웃해버린다. 총소리와 복도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 그 위에 너무나도 아름답게 에릭이 늘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이 흐른다. 에릭의 말을 빌리자면 재미있자고 한 일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죽고, 학교는 피바다가 된다. 이제 그날 하루가 끝나고 저녁이 찾아온다. 그러면 우리는 간단한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는다. 죽은 아이가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연주. 구스 반 산트의 말을 빌리자면 "영원히 그날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그날의 영화. 그래서 영화로 끝나길 바라는 영화".
칸 최고의 막가파 영화
<극도공포대극장 소 대가리>(極道恐怖大劇場 牛頭) | 감독 미이케 다카시 | 감독주간
누구도 처음에는 이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몰랐다. 미이케 다카시가 막 가는 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막 갈 줄은 정말 몰랐다. 그냥 소개된 줄거리에 의하면 ‘똘마니’ 야쿠자 미나미는 그가 모시는 ‘형님’ 오자키가 좀 미쳤다는 사실을 ‘오야붕’이 알게 되어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미나미는 ‘형님’ 오자키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이후로 ‘형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조직을 배신해야 할지 ‘형님’을 버려야 할지 결심해야 한다, 라고만 되어 있었다. 당연히 <극도공포대극장 소 대가리>(이하 <소 대가리>)가 야쿠자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정리된 줄거리는 영화가 시작한 지 고작 10분 만에 상황종료이다. 상식적으로도 이런 이야기는 여기까지 보여주고 나면 더이상 할말이 없다. 나도 야쿠자 영화를 한두편 본 게 아니다(이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미이케의 열혈 팬들께서는 훗날 감상하실 예정이라면 ‘제발’ 여기까지만!). 오자키는 애완견을 보고 야쿠자 살상전문견(殺傷專門犬)이라고 부르는 지경에 이른다. 걱정이 된 두목은 미나미에게 ‘안 보이게 좀 해달라고’ 메시지를 전하고, 이제 미나미는 형님을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만 교통사고로 예상치도 않게 오자키는 간단하게 죽는다! 만사통과? 그게 그렇지가 않다. 미나미가 오자키의 시체를 두고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상부에 보고를 하는 동안 갑자기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미나미는 레스토랑에 돌아가서 혹시 형님 시체가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냐고 묻는데, 이 레스토랑은 여장 남자 주인과 기괴한 두 여자가 운영하고 있다.
영화는 공포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냥 웃자고 만든 영화 같기도 하고, 아니면 부조리극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잔혹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어쩌면 세 가지 모두 다일 것이다(여기까지 쓴 다음 줄거리를 ‘자랑스럽게’ 정리 하다가 모두 지워버렸다. 볼 때는 정신없이 따라가는데, 써놓고보니 정말 말이 안 된다. 거의 정신나가서 대여섯편의 영화를 되는 대로 이어붙여 아무 데나 뒤죽박죽으로 쓴 것 같은 이야기가 태연자약하게 전개된다!). 우리는 항상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를 보면서 걱정하는데, 그건 다작중심주의라고 부를 만한 그 놀라운(정말 미칠 듯한!) 편수 앞에서 완성도의 기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도대체 한 사람이 만든 것이 맞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그의 필모그래피의 난조).
하지만 걱정 마시라. <소 대가리>는 그의 걸작의 한편이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기에(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진행 중인 그의 영화목록 앞에서 그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소 대가리>는 미이케 다카시의 가장 좋은 영화 중 한편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는다. 그래서 이게 모두 꿈일지도 모른다고(<오디션>) 피해가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소 대가리>는 울트라-쉬르리얼리즘의 끝까지 가본다. ‘형님’ 오자키를 찾으려는 미나미는 거의 편집광적인 지경에 이르는데도, 주변에서는 오히려 그를 능가하는 기괴한 일이 줄을 지어 벌어진다. 그게 정도를 넘어서서 보다 말고 내가 지금까지 영화를 잘못 본 게 아닐까, 라고 불안해질 지경이 된다(처음에는 낄낄대고 영화를 보던 칸의 ‘악동’ 영화광들조차 절반을 넘어서도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이 영화 앞에서 마침내 오! 노! 하는 탄식이 터뜨렸다). 그리고 오자키를 찾아주겠다고 레스토랑 주인이 벌이는 혼백(魂魄) 되찾기 무당주술에 이르러서는(사람이 분장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 소 대가리가 등장해서 혀로 미나미의 얼굴을 에로틱하게 핥기까지 한다. 점입가경! 절망한 미나미 앞에 웬 여자가 나타난다. 그러더니 자기가 ‘형님’ 오자키라고 태연자약하게 말한다.
믿어냐 하나 말아야 하나? 야쿠자영화가 공포영화와 뒤섞이더니 퀴어시네마로 어느새 슬그머니 옮겨간다(트랜스젠더?). 미이케 다카시는 <소 대가리>를 꼬리 아홉 달린 여우처럼 둔갑에 둔갑을 거듭시킨다. 그리고 이 ‘여자’ 오자키는 미나미와 섹스를 하고, 섹스를 하던 도중 ‘여자’ 오자키의 성기를 열고 그 안에서 ‘형님’ 오자키가 기어나온다(으악! 말 그대로 환골탈태의 경지). <소 대가리>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도대체 성립이 될 것인지 의아할 지경인데도, 보는 동안에는 정말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믿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이케 다카시는 조금도 웃지 않고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미나미의 자리에서 정신을 차리라고 뺨을 때려가면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빠져들어 헤어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루이스 브뉘엘과 일본 B급영화의 정신착란에 가까운 리믹스 버전. 혹은 괴수영화. 게다가 이 막 가던 영화가 마지막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올해 칸에서 이보다 더 막 가는 영화는 없었다.
추신: 칸 감독주간 공식 카탈로그에는 이 영화의 불어 제목 옆에 한자 원제가 달려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승두>(升頭)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화면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소 대가리>(牛頭)가 맞다. 카탈로그가 오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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