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도감을 뒤적이며 이렇게나 이름 모를 바다 생물이 많다는 것에 놀라곤 했었지만 이제는 무심히 보게 된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을 내세운 <니모를 찾아서>까지, 이러한 흐름은 일관된다. <몬스터 주식회사>와 <니모를 찾아서>에 공동감독으로 참여한 리 언크리치는 “픽사 사람들 중 누구를 만나도 번번이 듣는 말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캐릭터다. 모든 그래픽과 비주얼은 케이크 위의 당의 같은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파이널 환타지> 같은 영화를 보면 정말 놀라운 비주얼이 많지만, 박스오피스의 성적은 스토리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토이 스토리>부터 <니모를 찾아서>까지 5편의 시나리오를 공동 혹은 단독 집필한 픽사의 대표적인 작가 앤드루 스탠튼에 따르면, “처음 스토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표할 때는 굉장히 무섭다”고. 무엇보다 관객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를 고민하지만 픽사의 작품들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래세터의 말처럼, 그들 자신이 “가장 까다로운 관객이자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실제 스탠튼은 <토이 스토리2>를 11번에 걸쳐 재구성했다. “형편없었으니까. 픽사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우린 늘 우리 작품이 형편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좋아질 때까지 계속 해보자!’ 하는 거다.” <토이 스토리>가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른 것이나, <토이 스토리2>가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의 작품상을 수상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존 래세터에 따르면, 픽사 애니메이션의 제작기간이 <몬스터 주식회사>의 경우처럼 길게는 5년까지 걸리는 것 역시 스토리 개발에 많은 공을 들이기 때문이라고. 기술 담당인 토머스 포터조차도 “픽사에서는 과학과 예술이 만나면 예술이 이긴다”고 말한다. 모델링과 특수효과에 사용되는 에일리어스 시스템이나 마야, 포토숍 같은 기본적인 소프트웨어 외에 대부분 직접 개발한 인 하우스 시스템을 사용하는 이유 역시, 작품마다 감독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이미지, 예술가의 요구를 소화할 수 있는 독자적인 기술의 개발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기술진은 캐릭터의 유연한 움직임을 위한 마리오넷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니모를 찾아서>에서는 3D컴퓨터그래픽 이미지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물의 세계에 도전했다. 바닷속의 물살에 따라 흔들리는 물고기들의 지느러미나 산호초 등 각양각색 해양생물들의 자태는, 이제는 더 놀랄 일이 없으리라는 예상을 번번이 넘어서는 픽사 테크놀로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상상력의 실감나는 동거를 위해, 픽사의 애니메이터들은 직접 연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픽사에서는 아예 인력을 채용할 때부터 캐릭터를 얼마나 잘 연기할 수 있는가를 눈여겨볼 정도다. 2001년 11월, <몬스터 주식회사>의 해외 개봉을 앞두고 세계 각국 기자단을 샌프란시스코 근교 에머리빌의 픽사 스튜디오로 초대했을 때 엿본 제작 공정에서, 스토리 브리핑 과정의 재현은 가장 인상적인 기억 중 하나였다. 설리와 마이크가 그려진 스토리보드 수십장을 벽에 붙여놓고 하나의 시퀀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원맨쇼로 신나게 연기해 보이던 애니메이터의 모습. 때로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해 미리 녹음한 애니메이터들의 목소리 연기 이상의 적임자를 찾지 못하면, <벅’스 라이프>의 애벌레 하임리히와 <토이 스토리 2>의 펭귄 위지를 연기했던 스토리 담당 조 랜프트처럼 연속 출연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작품에 관한 한 무차별적인 의견 교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을까. 2000년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리치먼드의 전원에서 소도시 에머리빌의 신축 건물로 이사한 픽사의 스튜디오는 잘게 나뉜 제작 공정의 특성상 필요한 개인적인 공간을 보장하는 한편, 각자의 방에 고립되기 쉬운 애니메이터들을 배려한 구조가 돋보였다. 벽돌과 철제 사이사이 온실처럼 유리창이 넓은 건물은 밝은 분위기이며, 건물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름다리와 래세터의 말을 빌리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최고의 레스토랑”이라는 구내 라운지까지 갖추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티셔츠와 청바지 같은 편한 차림을 한 픽사의 애니메이터들은 구름다리에서 라운지의 안락한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는가 하면, 롤러스케이트와 스쿠터로 널찍한 구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니모를 찾아서>에서 환상적인 색감을 보여주는 해파리 장면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 특별한 것 없던 스케치가 컴퓨터 작업을 통해 깊이와 화려함을 얻는다.
픽사의 모험은 계속된다
무한대를 넘어서 “내가 아홉 번째로 픽사에 왔는데, 이젠 700명이 됐다”는 스탠튼의 말에서 느껴지듯, 17년의 시간 동안 픽사는 “제2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라는 스티브 잡스의 소망에 근접한 듯하다. 현재 픽사의 컴퓨터 회로 속에서는 따끈한 두편의 신작이 진행 중이다. 워너브러더스에서 <아이언 자이언트>를 만들었던 브랫 버드가 연출하는 는 신분을 감추고 교외에 은닉하던 슈퍼 히어로 가족이 세계를 구하러 나선다는 코믹액션어드벤처. 연출 일선에서 한동안 물러나 제작, 기획을 담당했던 존 래세터가 다시 감독을 맡을 는 온갖 종류의 차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될 예정이다. <니모를 찾아서>의 현란한 열대의 바다와 생물들에 이어 어떤 3D 애니메이션의 장관을 선사할지 아직 짐작하긴 이르지만, “아이에게 사랑받을 때 비로소 삶이 가치있는 거라고 나에게 가르쳐준 장난감이 있었지”라고 말하던 <토이 스토리2>의 버즈의 대사처럼, 관객의 마음을 얻기 위한 픽사의 유쾌한 시도가 될 거란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몬스터 주식회사>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것 같은 수많은 상상의 문 중에서 어떤 문을 열고 다가올지는, 2004년과 2005년의 방학까지 기다려야 알 수 있을 듯. 물론 인간에게 납치된 니모를 찾아 바다를 누비는 <니모를 찾아서>의 수중 모험에서 그 전조를 확인하고 난 다음에 말이다. 글 황혜림 blauex@hanmail.net·편집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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