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보험 수사관이었던 레너드는 아내가 강간,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을 겪고 충격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현재 시점으로부터 10분 전 정도까지만 기억할 수 있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과거의 일들을 모두 완벽히 잊었으면 좋으련만 스스로에게 남겨두는 집요하고 꼼꼼한 메모를 통해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만은 잊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을 해두고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새기듯 자신에 몸에 문신을 새긴다. 현실은 흘러갔다. 진실은 잊혀졌다. 고통도 분노도 다 잊혀졌다. 남은 것은 기록일 뿐이고 그 기록을 확인하는 지금, 새로운 분노가 일어난다. 과거는 현실일까 가상현실일까. 과거에 대한 기록을 보고서 생겨나는 감정은 정당한 것일까. 10분 이상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의 사건을 기록을 통해 애써 기억하면서 정신적 고통과 복수심을 유지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과연 범인을 쫓는 것인가, 기억을 쫓는 것인가, 기록을 쫓는 것인가.
언젠가 아내를 살해한 범인(과거)에게 복수를 하고 말겠다(미래)는 결연한 의지와 실천(현재). 그 삶의 목표은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 꿈을 향해 달려가는 오늘도 과거에 얽매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다. 잊혀지지 않는 과거란 그렇게 영향력이 막강한 것이다. 당신의 미래의 꿈은 오래 전에 어떤 날 마음속에 간직한 결심. 그 꿈을 향해 사는 오늘은 결국 그 꿈을 처음 가졌던 과거를 향하는 것이 아닌가. 과거가 지워지지 않는다면 모든 시간은 과거를 향한 채 뒷걸음질로 미래로 흐른다.
망각은 가장 완벽한 진통제. 망각은 다목적 방어기재. 망각은 모든 가치관을 초월한다. “레드 선… 당신은 지금 전생으로 갑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지요?” 피최면자는 통곡을 한다. 전생여행을 통해서 다시 만나는 먼 과거의 고통. 그것은 마치 일사부재리의 원칙처럼, 한번 고통받았으니 더이상은 그 일로 정신적 고통을 받지 말라고 해서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된 과거사이다. 다시 태어나면서 새로 포맷된 기억저장고에 먼 과거의 기억이 기록으로 다시 새겨져서 좋을 게 뭐 있을까. 인간이 윤회를 한다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은 조물주 나름대로의 깊은 배려에 의한 것이리라. 우리 모두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생의 어떤 악연이나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계속 고통받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만약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우리 모두가 유아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학창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니면 10년 단위의 기억만 있다면? 우리 사는 현실은 어떨까. 과거사에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게 마련이지만 기억으로 남아서 후유증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래도 나쁜 일쪽이다. 과거의 나쁜 기억들이 콤플렉스로 작용하는 것 아니던가. 역시 망각이란 현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갖도록 해주는 축복인 것 같다. 마치 내신성적 백지화 같은 것, 부채탕감 같은 것 아닐까. 두고두고 괴로운 일에 대해서 가장 완전한 면죄부는 ‘없었던 일로 해줄게’가 아닐까. 그런데 과거를 다같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없었던 일, 과거는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기억이 없다면 그것은 없었던 일이다.
문제는 기록이다. 나는 망각했으므로 나에게 그런 일은 없었는데 기록이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기록을 볼 때마다 상기시켜준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 과거이다. 박제된 과거. 꽃이 피고 시들어 떨어지고 나면 흔적도 없이 썩어 사라지듯 과거는 그렇게 사라져야 한다. 그 어떤 끔찍한 사건이었던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기억은 희미해지는데 기록은 생생하다. 사라지지 않는 과거는 가장 참혹한 비극이다. <메멘토>가 그 어떤 영화보다 섬뜩하고 잔혹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는 지워진 과거가 몸뚱이에 지울 수 없는 문신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김형태/ 無規則異種藝術家 kongtem@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