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강유원(철학박사) 2003-05-29

사람은 이성적 존재라고 하지만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다. 사람이 이성적 존재라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겠는가. 아니 차라리 이성적 존재가 아닌 게 나을지도 모른다. 사방에 이성적 존재라면 정말 재미없는 세상일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를 멀리서 심각한 데서 찾을 필요도 없어 보인다. 별거 아닌 일에 열받고 발끈하고 그것 때문에 인간관계 망가지는 것만 봐도 이성적 존재가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누구를 처음 만났을 때나 누구의 글을 읽었을 때, 그에 대한 호감과 불쾌감은 그에 대한 이성적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 때문에, 또는 어떤 단어 하나 때문에 그가 보기 싫을 수도 있고, 바로 그것 때문에 그가 엄청 좋아질 수도 있다. 이것이 일관성 있게 적용되면 일종의 취향이겠는데 이 취향을 사람들은 억지로 이성적인 것이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리를 달달 떨면서 말을 하는 사람과는 그가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향기로운 단어를 쓰고 있고, 무지하게 아름다운 사람이고, 아네트 베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눈웃음을 잘 친다 해도 다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취향이 있다. 입과 다리가 따로 노는 꼴이 아무래도 싫어서다. 다리를 떨면서 말을 한다 해서 그가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싫다. 싫은 걸 어쩌리. 글 쓸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문장에서 사용하는 사람도 싫다.

술을 마시고 비틀대다가 무거운 나무 상자가 왼쪽 발등에 떨어져서 뼈가 깨지는 바람에 거기에 석고를 대고 목발을 짚고 6개월을 지낸 적이 있다. 목발을 해보니 무슨 놈의 문턱은 그리 높으며 계단은 왜 그리 많던지. 발을 다치고 보니 새삼 몸이 중요한 걸 알았다고나 할까. 다리 떨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입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 그때 잠시나마 모든 걸 발의 관점에서, 몸의 관점에서 본 적이 있다. 뭐 해보자는 말하는 것과 그거 실행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높은 사람들은 ‘이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지나가면서 슬쩍 말한다. 그 사람들은 그런 말하기 쉽다. 자기 몸으로 하는 거 아니니까. 자기가 안 해봤으니 그거 하다 보면 하루가 가는 걸 모르는 거다. 혀에서 단내 나도록 해봤자 일 열심히 안 한다고 못마땅해 하는 소리만 돌아온다. 그런 작자들을 보면 마치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고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단두대에 올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조차 한다.

몸이 아닌 말로 해결하려는 악습은 어디에나 붙어 있다.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은 뭐든지 머리로 해결하려는 악습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일반적인 병폐가 바로 이것이다. 몸으로 익히는 학문, 몸으로 알아내는 세상, 이것이 있은 다음에야 제대로 된 학문이 있을 것이다. 굳이 학문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어려운 말을 이리저리 꼬아대서 말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내 몸의 감각 기관에 닿아 오지 않으면 그건 아무짝에 쓸모없는 말이다. 말들끼리 장난치고 놀자고 만들어진 말이다.

몸으로 때워서 알아내지 않은 세상살이는 공허하다. 우리를 조이고 있는 것은 정말로 엄청나게 강한 일상이라는 족쇄인데, 몸으로 때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족쇄를 좀처럼 알지 못한다. 일상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상상해보라. 예전에 들뢰즈라는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가 아파트 창문으로 뛰어내려 깔끔하게 세상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가 그 동네의 일상을 깨뜨렸다는 것이었다. 창문 밖 도로에 피떡이 되어버린 시체가 누웠으니 앰뷸런스가 왔을 테고, 앰뷸런스 오느라 차 막혔을 테고, 차 막혔으니 짜증난 사람 많았을 테고, 시체 치운 다음에 청소부는 피 닦느라 화딱지났을 테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일상사인 것이다. 뭐 잘났다고 투신 자살을 하나, 깊은 바닷물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 죽었으면 정말 깔끔했을 텐데.

가끔 디지털카메라로 발을 찍어서 혼자 감상하곤 한다. 이 발이 그나마 이 정도여서 멀쩡한 티 내면서 살아갈 수 있으니, 별탈없이 일상을 영위해서 먹고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마음에서이다. 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