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라는 이가 광주 망월동에 갔다가 한총련 학생들 때문에 한 시간쯤 늦어졌다고 난동이라느니 대통령 못해먹겠다느니 소란을 떠는 광경을 보며 십수년 전 이 즈음이 떠올랐다. 88년 5월, 갓 제대한 나는 이성욱(지난해 가버린 문학평론가. 형은 그렇게 싱겁게 갈 거면서 그렇게 공부했소)과 망월동에 가서 인사했다. 무사히 제대했습니다. 바로 살도록 님들이 도와주세요.
그리고 보길도에서 사흘 지냈다. 버너가 고장났지만 서울서 온 여성노동자 일행에게 얻어먹게 되어 오히려 배불리 지냈다. 그 여성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물었다. 사회에 대해 알고 싶은데 읽을 만한 책을 하나 권해주세요. 나는 갖고 있던 루이제 린저의 <북한기행>을 주었다.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이성욱이 마땅치 않은 얼굴이 되어 자리를 떴다.
여행에서 돌아와 서울영상집단에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이성욱이 왜 그랬는지 알았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한국의 운동권은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로 갈려 반목하고 있었다.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NL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성욱이나 서울영상집단은 PD였다. 갓 제대한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하지 못했고, 이성욱은 그런 나에게 싫은 소리는 못한 채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PD는 NL을 ‘주사’라 부르곤 했다. 주체사상, 혹은 북한체제에 경도된 그룹이라는 말이다. NL에 그런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제 부역자들이 다스리고 영화를 누리는 남한에서 자란 청년들이 반공 파시즘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런 정통성에서 우월한 북한체제에 호감을 갖는 건 한편으론 당연한 일이었다. PD 역시 레닌에 경도되었다가 소련이 무너진 뒤 공황상태를 겪었으니 나을 것도 없었다.
90년대에 NL에 대한 내 거부감은 지속되었다. 미국의 식민지에 살면서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얼빠진 사람이겠지만, 계급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는 민족주의는 내겐 또 다른 형태의 엘리트주의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나는 NL이 통일운동의 공로자라 여기는 정주영씨를, 돈으로 통일운동의 공로마저 구매한 사람이라 여긴다. 식칼 테러로 노동자들을 앗아 모은 더러운 돈으로 말이다.
오늘 나는 NL을 ‘노선이 다른 동료’라 여긴다. 내가 생각을 고쳐먹을 만한 일이 있었다. 3년 전 나는 한총련의 선봉학교라 할 광주의 어느 대학에 강연을 갔다.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회 간부 하나가 남이 들을 새라 조용히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저희 싫어하시죠.” 나는 천천히 내 생각을 말했다. 내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나는 그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NL에 대한 내 거부감이 그 청년의 착한 눈빛에 떳떳할 만큼 섬세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을 바꾸려 싸우는 사람들은 늘 노선이 갈리고 반목한다. 그들의 치열함이 그들의 크고 작은 차이들을 두루뭉술 넘길 수 없게 하는 것이다(품위있는 이들은 그걸 두고 ‘운동권의 속성’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그런 이들이 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단지 그런 이들의 삶이 제 품위를 흐트러트릴 만큼 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낱개로는 미숙함 투성이인 사람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 미숙함을 착하게 바치고 제 미숙함을 자책해가며 함께 조금씩 진보를 이룬다. 물론 그 미숙함을 논평하는 이들은 언제나 그 미숙함으로 이룬 진보에 편승한다. NL을 혐오하기엔 내겐 혐오할 인간이 참 많다. 김규항/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