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의 영화들은, 모순을 허락한다면, 눈으로 들어야 한다. 촬영감독 로비 뮬러와 함께, 그리고 음악 친구 라이 쿠더나 U2와 함께 그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시청각적 체험을 스크린 위에 투사하면서 관객의 오감을 간지럽힌다. 만들어진 지 20여년 만에 다시금 DVD로 마주한 <파리, 텍사스> 역시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응에 대한 빔 벤더스의 도저한 매혹을 체험케 한다. 라이 쿠더의 미니멀한 기타음이 울려퍼지는 오프닝, 그 사운드와 겹쳐져 사막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낯선 남자의 얼굴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혀가 잘렸나보군. 아님 비밀이 있던가.” 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했던 이로부터 달아났던, 어떤 언어도 국적도 정체성도 필요없어지는 곳을 갈망했던 남자는 영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비로소 쉴새없이 기나긴 고백을 토로한다. “난 이 두 사람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 순간조차 카메라는 그의 얼굴이 아니라 듣고 있는 여자의 눈물 젖은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 설령 이 부분에서 대사가 우리 귀에 들리지 않게 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녀의 얼굴만으로도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을 것이다.
“난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던 것 같다. 19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반에 독일에서 태어난 남자의 이야기 말이다. 그건 나의 이야기기도 하다. 그에게 그곳은 너무 협소하게 느껴진다.” 빔 벤더스는 샘 셰퍼드의 소설 <모텔 연대기>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하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미국의 서부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한다. 유럽인에겐 너무나 낯선 서부의 광대한 사막, 매직 거울이 달려있는 수녀원에 가까운 홍등가의 풍경, 서부의 모텔들을 채우고 있는 이상한 공허함…. 그에 덧붙여 빔 벤더스는 <파리, 텍사스>가 거의 즉흥에 가까운 방식으로 촬영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전에 로비 뮬러와 그는 드로잉과 크로키를 먼저 완결시킨 다음 촬영을 시작했지만, <파리, 텍사스>는 그날 아침 눈을 뜬 뒤 보이는 풍경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그날 찍을 장면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토록 광대하고 낯선 풍경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척 단순해지고 축소된다. 나는 전체가 아니라 그날 찍을 장면만 생각했다. 장소로부터의 영감으로 이 영화는 이루어졌다. <파리, 텍사스>는 우리의 기억과 경험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빔 벤더스는 그렇게 순수한 상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영화라는 물질을 구축하였지만 그것이 허세에 가득한 과시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 ‘미적 가상의 세계’를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젊은’ 벤더스의 진심 때문이다. 무슨 뜻이냐고?
<파리, 텍사스>는 이상하지만 어떤 면에서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를 연상시킨다. 아이와 아내로부터 달아났던 주인공 트래비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4년이 긴 시간인가?” “아이에겐 긴 시간이지. 그에겐 반평생이니까.” <유레카>의 세 주인공이 상처에서 회복되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며, 그 과정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3시간37분에 걸쳐 무척이나 느리고 힘겹게 움직였다. 아오야마 신지는 상처에서 회복되기까지 그 정도의 시간은 걸린다고 단호하게 결정내렸던 것이다. <파리, 텍사스>는 4년이 흐른 뒤에도 기억에 맞서고 그에 대해 발화하기까지 지극히 고통스러운 순간을 통과해야 하는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돌이킬 수 없는>의 마지막 대사를 빌려오자면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야만 한다. 빔 벤더스는 가슴을 후비는 듯한 엔딩장면에서 (빔 벤더스의) ‘로드무비’가 왜 특별한지를 그렇게 방증한 셈이다.김용언 mayham@empal.com
Paris, Texas Collector’s Edition, 1984년감독 빔 벤더스 | 출연 해리 딘 스탠튼, 딘 스톡웰, 나스타샤 킨스키장르 드라마 | DVD 화면포맷 오디오 돌비디지털 5.1 & 2.0 서라운드 | 출시사 미디어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