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대학교 동기를 우연히 만났다.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요즘엔 뭐하냐?” “친구가 회사 차려서 거기 일 도와주고 있어.” “나는
지금 논다.” “그래?” “가끔씩 나오는 사무실이 있는데, 지금 거기다. 여의도야.” “그래? 나도 여의도인데.” “그래? 나는 L빌딩
옆의 K빌딩이야.” “어, 나도 거긴데.” “808호야.” “나, 809혼데.” “당장 와라!” 마주보고서는 이 우연이 너무나 놀라워서
이리 묻기도 했다. “너 혹시 신기(神氣) 있는 것 아니냐.” 5년 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이렇게 연락이 되네, 했더니 옆 사무실이라니.옷깃을
스치는 것은 전생의 인연이 억겁으로 쌓여야 한다는데 이생의 인연 역시 선녀의 옷깃이 바위를 깎는 끈기로 쌓여야 이루어지는 것 같다. 우리는
그래서 약속을 하고, 10분 늦으면 약속 장소를 빙빙 돌며 알아보지 못한 건 아닐까 하며 전화를 하고, 헤어질 때는 연락하지 않으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게 분명하기에 연락처를 교환한다. 혹시나 천생연분을 ‘우연’이 닿지 않아 만나지 못할까 고심하며 중매쟁이를 찾고 미팅을
하고 소개팅을 한다. 우리가 우연히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단지 우리가 할 일은 길을 나서거나 지하철을 타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보라. 드라마의 배경은 명동이고 종로고 강남인데도 서로 길가다 부딪혀서 만나서 사랑한다. 만나서 사랑하다보니
과거에 그들은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로 그 사람이었거나 출생의 비밀이 얽힌 사이다. 그들이 잘생긴 선남 선녀이어서인가,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자여서인가, 이타적인 선인이어서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연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능력을 얻지는 못하는
법인데. 점쟁이도 아닌데. 필시 언제 올지를 알고 그 장소에서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면 일어나지 않을 우연들이
그곳에선 가능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현실성을 판가름하는 지수로 ‘우연 지수’를 제안한다. 이 지수는 높을수록 드라마적이다. 단순하게 우연이 생길 때마다 1씩을 더했고
우연이 겹칠 경우에는(“알고보니”로 표시. “하필이면”은 지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2를 더했다(확률 계산에서는 제곱이 더 적당하겠지만).
엄밀함은 없으니 1이나 2가 뒤졌다고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고, 공정치 못한 계산이므로 억울해할 필요도 없다.
“하필이면” 죽고, “알고보니” 그 남자
<비단향꽃무>(KBS2 월·화 9시50분)에서영주(박진희)는 교생선생님인 민혁(이창훈)과 사랑에 빠진다. 대입을 치른 뒤 엄마는
사기를 당하고 그 충격으로 쓰러진다. 고아가 된 영주(박진희)와 민혁은 살림을 차리지만, 행복도 잠시 임신한 영주를 남겨두고 “하필이면”
민혁은 교통사고로 죽는다. 영주는 아이를 낳아서는 혼자 기른다. (여차저차하여) 그녀는 법적 소송을 준비하다가 의리의 변호사(한진희)를
만난다(1). 그 변호사가 능력있는 변호사 아들 승조(류진)를 소개시켜주는데(2) “알고보니” 승조는 영주가 사랑했던 남자의 고등학교 동창(+2=4)이다.
영주의 당당함에 승조는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문구회사의 공모전에 응모를 하고 그 회사에 입사한다. 영주의 직속 상사는 “알고보니” 승조를
좋아하는 여자(+2=6)이며 이 회사는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것이다. 민혁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는 영주가 입사한 회사와 라이벌 회사(7)다.
우연 지수 7. 하지만 지수로도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우연이 이 드라마의 전제조건이다. 그건 민혁의 동생 우혁이 영주가 사랑하는 남자와 동행하는 현장을 항상 숨어서 지켜본다는
것이다. 민혁이 혹시나 영주의 손을 잡아서 호주머니에 넣어주면 전봇대 뒤에는 우혁이 있고, 승조가 영주를 집에 데려다주는 날에는 우혁이
어둠 속에서 나타난다. 영주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그런 우연에 “(놀란 목소리로) 우혁아”라고 대처한다. 우혁은 승조나 우혁의 아버지가 설마,
설마했지만 “딴 마음을 먹”고(영주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니 우연을 만드는 제1법칙은 뭐니뭐니해도 사랑이다. 여기서는 “사랑하는 남편을
여의고 혼자 자식을 키운다”는 대물림이 일어나는데, 이는 “상속되는 업보”로 우연을 만드는 제2법칙이다. <우리가 남인가요>에서는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연은 나의 운명, 나의 숙명
<우리가 남인가요>(KBS1 월∼금 8시25분)에서 윤주(배종옥)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아버지의 회사에취직한다. 그 회사를 다니는(1) 동욱(김호진)은 윤주보다 5살이 어림에도 그녀를 따라다니며 구애를 한다. 실향민인 오분희(나문희)가 키운
고아 인자의 자식이 윤주이다. 오분희는 세들어 살다가 부모가 북으로 가는 바람에 고아가 된 상호(이정길)를 인자와 맺어주려 하는데 인자가
낳은 자식이 상호의 아이라고 생각한다. “알고보니” 상호의 아들이 동욱(+2=3)이다. 작은아버지의 회사에는 윤주의 동생인 윤호(박광현)(4)도
다니고 있는데, 그의 여자친구(미애)의 동생과 동욱이 만나게 되고 그 동생은 동욱을 좋아한다(5).
우연지수 5. 상속되는 업보. 윤주의
계모인 정숙(박원숙)은 계모 밑에서 자랐다. 정숙은 윤주가 재복(주현)의 자식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받는다. 미애는 고아인데 오분희
여사는 고아를 많이 거둬들여 키웠다. 그게 이 드라마의 시작이 된 셈이고. 자기 며느리가 고아라서 탐탁지 않게 여긴다.
우연, 드라마시티의 필연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우연지수의 왕좌에 오를만한 드라마는 <아름다운 날들>(SBS 수·목 9시55분)이다.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연수(최지우)와 세나(이정현). 빅토리 레코드사의 사장 이성춘(이정길)은 해마다 고아원을 찾는데 어느 해 둘째아들
선재가 그곳에 따라간다. 그곳에서 연수와 세나의 생일파티에 끼어들게 되고(이것도 우연이라면 우연!) 연수는 선재에게 그림을 선물로 준다.
성장한 연수는 나래와 음반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동생 세나가 가수가 되겠다며 가출을 했는데, 언젠가 그곳을 찾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시 세나는 그곳에서 음반을 훔치다가 들킨다(1). 인기가수 엄정화를 위장하기 위해서 빅토리 레코드의 이민철 실장은 연수를 픽업한다(2).
그날 빅토리 레코드의 축하연이 벌어지는 디스코텍에서 연수는 춤추는 민지를 보고, 세나 생각이 나서 보호해주는데 “알고보니” 그는 민철의
동생(+2=4)이다. 민지를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일찍 집을 빠져나온 연수는 민철를 다시 한번 더 만난다(5).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연수는 빅토리 레코드사 사장 아들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어서 민철에게 호감을 느낀 점도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 남자는 선재의 형(+2=7)이다.
역시 선재는 자신이 고아원을 방문했을 때 받은 그림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을 만큼 그 소녀를 좋아했는데, 그 소녀가 연수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한다. 세나는 킥보드를 타고 가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선재와 부딪히고(8) 그와 함께 밤거리를 쏘다닌다. 세나는 가수 훈련을 오정훈(이상우)에게
받는데 정훈이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고 데려간 곳에 선재가 나타난다(9).
세나 선생님! 이제 얘기해주세요. 소개시켜준다는 사람 누구예요?
정훈 어… 내 후밴데요. 세나씨가 가수 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녀석이에요. 그 녀석… 빅토리 레코드 둘째아들이거든요.
(그때, 카페 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세나 출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기 때문에 선재 얼굴 보지 못하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선재 (세나 앞에 와서) 안녕하…(하다가 세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세나씨!
세나 (선재를 올려다보고 깜짝 놀란다) 오빠!
(정훈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어리둥절하고)
물론, 세나는 어릴 때 고아원을 방문했던 사람이 선재란 사실을 알게되면서 감동의 도가니다.
세나 (선재를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오빠! 지난번에 나한테 그랬죠? 어렸을 때, 아버지하고 고아원에 간 적이 있다구….
그러니까, 사장님하고 같이 갔었다는 거죠?
선재 네!
세나 거기가 혹시 은혜원 아녜요?
선재 이름은 잘 기억 안 나구요. 크리스마스 때 갔었는데….
세나 크리스마스요? 그날 혹시 여자애 하나가 병원에 실려간 일 없었어요? 뜨거운 물에 데어서…
선재 맞아요! 내가 병원까지 따라갔었어요.
세나 나예요! 나! 그 꼬마가 나예요!
선재 (놀란다.)
민철는 민지의 교육을 위해서 연수를 가정교사로 들인다. 왜냐하면 민지는 연수와 똑같이 미술학도(10)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음악을
발표하는 작곡가인 ZERO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별로 놀랍지 않겠지만, “알고보니” 그는 선재(+2=12)이다. 평소에 제로의 팬이던
세나는 까무러칠 지경이다(“오빠가 제로라는 거, 나한텐 꿈같은 일이야. 내가 좋아하는 오빠가 바로 제로라니 나한테 기적 같은 일이라구!”).
우연지수 12. 여기서 발견되는 우연의
제3법칙은 “같은 우물”이다.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서로 아는 사람이 생기고 그러면 “여기 이 동네가 좁아서
말이지”라고 한다. <아름다운 날들>의 우물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사람들도 약속을 하면 참 못 만난다.
세나와 연수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가 약속이 안 지켜져서다. 세나와 만나기 위해 서울타워로 가던 연수는 갑자기 차에 부딪히고 말았다. “재수없다”고
해야 하나, “하필이면”이라고 해야 하나.
드라마에서 존재하는 병원은 하나고, 법률사무소도 하나고 등장하는 업종도 하나다. 주인공은 적어도 두명에게서 프로포즈를 받고, 적어도 한쪽
부모가 없거나 일찍 죽었다. 그것이 드라마 시티다. 그렇게 적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살아가니 안 부딪힐 수가 없다. 우연은 드라마 시티의
필연이다.
구둘래|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