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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라 운 드
<가문의 영광> - ‘조폭코미디’의 화려한 변신
그 모든 일은 <가문의 영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가문의 영광>은 철저한 기획과 변신의 산물이다. 이 영화는 성공한 선배 영화들부터 철저히 배웠다. <조폭 마누라>의 ‘뜻밖의 성공’과 <집으로…>를 통해 확인된 분위기의 ‘뜻밖의 반전’. 모두가 이 변덕스러운 대중의 입맛에 당황하고 있을 때, 이 영화는 전자의 엽기적인 웃음 코드와 후자의 잔잔한 감동 코드를 적절히 결합하는 기민함으로 그 혼란스러운 국면을 돌파한다. 이런 점에서 <가문의 영광>은 한 시기를 주름잡았던 조폭코미디의 정점이면서 장르적 소멸의 징후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다소 과격하게 시작했던 이 영화는, 중반 이후 감상적인 멜로영화로 바뀌며, 끝내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한 가장의 가슴 찡한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가족드라마로 막을 내린다. 사실 이 영화에 남은 조폭의 흔적은 스타일리시하게 물신화된 ‘쓰리제이’(박근형)의 멋진 액션신과 짜증날 정도로 남용되는 전라도 사투리 욕설(언어 폭력)뿐이다. 진짜 피튀기는 액션은 마지막 한방(감동적인 가족애)을 위해 아껴둔다.
정작 이 영화의 가장 ‘조폭’스러운 점은 쉽게 결합되기 힘든 그 두 가지 코드(웃음과 감동)를 하나로 엮어가는 그 완력과 괴력에 있다. 이 영화는 도대체 관객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그 작은 징후 중 하나. 대배우 박근형의 전라도 사투리 구사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어색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이 개명천지에 여자의 순결이 남자의 발목을 잡을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그 시대착오적인 폭력과 협박에 배울 만큼 배운데다 사회적 지위도 갖춘 남자가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지, 박대서(정준호)가 예외적인 순진남이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나름대로 힘있는 그의 부모가 어떻게 그 공포의 상견례 이후 그렇게 갑작스럽게 비굴해질 수 있는지…. 영화는 순진한 관객이 가질 수 있는 이러한 의문들을 그냥 완력으로 눌러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황당함에는 숨은 비밀이 있다.
<가문의 영광>
<가문의 영광>의 원작은 원래 80년대 시대상을 되돌아보는 풍자코미디로 쓰여졌다. 조폭은 80년대의 무식하고 힘만 셌던 신군부 세력을, 명문대 출신 경영자는 그들에게 무력하게 유인포섭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던 이른바 서울대 출신들을 각각 상징한다. 그렇다면 그 시대착오성과 황당함이야말로 전근대적 폭력이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압도했던 우리의 80년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치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 진지했던 의도는 상업적 고려에 따라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고, 결국 우리가 본 영화 <가문의 영광>이 탄생되었다. 천재적인 독해능력 없이는 원래의 그 진정한 의도를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상태로, 말하자면 일종의 기형아로 이 영화는 세상에 나왔다. 진지했던 풍자정신은 ‘둘 중의 하나가 먹히면 된다’는 도박정신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렇듯 사회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를 위한 소재적인 뇌관을 포함하고 있으되, 상업적 고려를 통해 그것을 피해가는 양상은 이후의 모든 대박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다.
<가문의 영광>이 성공한 또 하나의 비결. 이 영화는 ‘둘 중의 하나’로는 불안했던지 ‘여러 개 중의 하나’로 전략을 확대한다. 그 무기는 주로 TV로부터 조달된다. 작게는 이 영화를 지지했던 한 관객조차 유치하다고 고개를 흔들던 ‘알까기’ 설정에서부터 크게는 중후한 사극배우 유동근의 화려한 변신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30, 40대 아줌마를 겨냥한 간통 유부남의 징벌 코드(드라마 <아줌마>가 떠오른다), 청순한 10대의 감성을 겨냥한 ‘별을 좋아하는 남자’의 코드. 이 왕성한 소화흡수력 탓인지 아니면 적절한 관람등급 조절 덕택인지 <가문의 영광>은 어쨌든 세대와 계층과 성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국민영화’적 흥행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그럼으로써 이후 한국 코미디영화에 귀감이 될 만한 전형과 모범을 창출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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