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한국 코미디영화에 던지는 두개의 짧은 문제제기
1. 코미디영화는 한국영화의 효자인가?
<선생 김봉두>
<지구를 지켜라!>
우리는 배우 차승원이 왜 볼멘 목소리로 ‘코미디영화 효자론’(작품성 높지만 흥행성 없는 영화와 싸구려라고 욕 먹지만 흥행에 성공한 코미디 영화를 각각 ‘공부 좀 한다며 집안 일은 나몰라라 하는 형’과 ‘배운 것 없지만 집안 먹여 살리는 동생’에 비유한 말)을 제기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 한국의 영화를 산업적으로 지탱해온 것은 바로 그 영화들이었고, 그들은 또한 나름대로의 변신과 분화의 과정을 통해 일정한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차승원의 ‘두 형제론’은 사태를 너무나 단순화시키고 있다. 한국영화에는 많은 형제들이 존재해왔다. 물론 형들 중에는 거품에 들떠 호방함을 과시해 돈만 축낸 형도 있기는 했지만, 그중에는 공부하는 자세로 진지한 영화를 만들어냄으로써 관객에게 ‘한국영화도 볼 만하구나’ 하는 인식을 높여준 형들도 있고, 해외에서 상을 받음으로써 한국 영화의 대내외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전반적으로 높여준 형들도 있다. 그 영화들은 한국영화 전체에 일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가가치를 창출해주었던 것이다. 내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관객이 한국 영화를 찾기 시작한 이후 코미디영화의 전성기가 왔던 것이지 그 역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코미디영화는 벌어놓은 재산을 셈 빠르고 눈치 빠르게 지켜내고 있는 효자일지는 몰라도 결코 ‘가출해서 몸으로 때우며 일해 모은 돈을 집에 부치는’ 눈물겨운 효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나 손쉽고 안이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돈을 챙겨왔을 뿐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자본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상업성과 장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치열하게 과거의 상투적 코드와 맞서며 진화해왔던 한국영화의 창조적 잠재력. 그 중심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색깔을 추구하며 그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감독(영화 생산자 전체의 대표자로서)들의 도전과 헌신이 자리잡고 있다. 이제 거품이 빠지면서 위기가 거론되는 현재, 그들의 창조력이 갖는 문화적 자본으로서의 가치는 그만큼 더욱 소중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멀티’플렉스의 확산 이후 더욱더 ‘모노’해져가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배급구조와 영화시장의 상황은 바로 그 귀중한 자산을 압박하고 질식시켜왔다.
2. 진정한 ‘가벼움’의 미학을 위하여
“유머는 재담이나 우스운 이야기처럼 단지 해방시켜주는 어떤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뭔가 위대하고 사람을 열광케 하는 어떤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해보자. 월요일에 사형장으로 가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나 같은 놈팡이 하나가 교수대에서 사라진다고 한들 뭐가 대수란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잘 돌고 있던 지구가 멈출 것도 아닐 텐데’… 유머는 현실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말은 자아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막막한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내 굽히지 않으려고 하는 쾌락 원칙을 의미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프로이트,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영화가 그중에서도 코미디영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가벼워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가벼움의 미학’은 현실의 냉엄함을 가리고 은폐시킴으로써 얻어지는 망상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고 뛰어넘는 자기해방적이고 긍정적인 환상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감상성에 기초한 망상적 위안은 현실을 부정/부인하는 도착성에 불과하다. 망상은 더 큰 망상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으므로 중독적인 것이고 근본적으로 자기파괴적인 것이다. 냉엄한 현실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현실을 긍정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유머/웃음. 불행하게도 현재 대박이 터지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적당하게 조합된(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따로 노는) ‘웃음과 감동’의 결합이 아니라, 진정으로 ‘웃으면서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기적 같은 순간들.
돌이켜보면 한국의 코미디영화 중에는 이런 기적 같은 순간들을 일궈낸 작품들이 있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 <라이터를 켜라>와 <지구를 지켜라!>(두 영화의 제목이 모두 명령형의 절규라는 것이 내겐 의미심장한 우연처럼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봉구(김승우)가 큰 희생 끝에 지켜낸 백수의 마지막 자존심(라이터)과 병구(신하균)가 죽으면서까지 밝혀낸 최후의 진실(‘그’는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진짜 외계인(자본가)이었다)은 진짜 가슴 뭉클한 위안과 정신 번쩍 드는 각성의 순간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 감동과 진실에 도달하는 그 감독들의 화법에는 진정한 ‘가벼움의 미학’이 있다. 그것들은, 감독 자신의 개인적 진정성과 영화사적 또는 장르적 컨벤션의 압력이 충돌하는 화학적 발효 과정의 산물이었기에 진정으로 영화적인 것이었고 또 그렇기에 진정한 환상이기도 했다. 그 영화들 속에서 나는 한국 코미디영화 또는 대중적 장르영화의 미래를 발견하며 즐거웠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영화 시장 전체의 토양은 나날이 척박해져가고 있고, 그래서 그 소중한 싹이 그대로 말라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또 다른 영화를 하루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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