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웃기고 싶다
“그거야 <영어완전정복>이죠.” 올해 개봉할 영화 중 가장 궁금한 작품이 뭐냐고 물었더니 류승완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농담삼아 한 얘기지만 “사,랑,해, 대사도 컷 나눠 찍고 연인들이 만나는 장면에 슬로모션 걸리는, 김성수식 코미디 정말 궁금하지 않아요”라며. <무사>의 감독 김성수와 코미디라는 낯선 조합에 궁금증을 느끼는 건 류승완 감독만이 아닐 것이다. 남자들의 청춘영화 혹은 액션영화로 유명해진 감독이기에 <영어완전정복>이 뭐기에,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일단 확실한 것 하나, <영어완전정복>이 로맨틱코미디라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다. 틈만 나면 공상에 빠지는 어리숙한 동사무소 직원이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겪는 해프닝과 로맨스가 이야기의 큰 틀이다. 동사무소 직원 영주로 이나영이 출연하며 여자 꼬시는 일에 열정적인 사내 문수로 장혁이 나온다. 이야기나 캐릭터가 암시하듯 이 영화는 최근 코미디 유행에 발맞춘 기획영화다. 때문에 김성수 감독이 <영어완전정복>을 연출한다는 얘기가 들리자 “나비픽처스가 어렵긴 어렵나보다””는 말도 나왔다. 나비픽처스는 2001년 12월, 김성수 감독과 조민환 프로듀서가 공동으로 설립한 영화사. <영어완전정복>은 나비픽처스가 창립한 지 1년5개월 만에 촬영에 들어간 첫 장편영화다.
이러저러한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당사자를 만나는 것이다. 지난 5월15일 아미가호텔에서 <영어완전정복> 제작발표회가 끝난 다음 김성수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무사> 촬영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일례로 ‘욕쟁이’로 소문난 그가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는 한번도 욕을 안 했다고 한다(정우성 매니저로 여러 차례 김성수 영화현장을 봤던 이원준씨와 프로듀서 조민환씨의 증언). 찍는 영화가 다르면 감독의 태도도 달라지는 것일까? 코미디영화 감독 김성수는 액션영화 감독 김성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영어완전정복>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이 사람, 돈 거 아니냐’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을 텐데.
몇몇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 그런데 뭐 실제로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없었고, 나랑 조민환이 같이 회사를 꾸리고 있으니까 ‘돈에 눈이 멀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좀 있는 것 같더라. (웃음)
그런데 어떻게 이 영화를 하게 된 건가.
시나리오 보고 결정했다. 사실 난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워낙 장기 프로젝트라서 해외 파트너들과 얘기하던 중에 시나리오를 보고 하고 싶다고 조민환을 졸랐다. 거의 반 협박을 했지. (웃음)
그러면 시나리오는 애초에 본인과 무관하게 개발되던 거였나.
일종의 프로듀서 격으로만 참여한 거였다. 전체적인 진행은 조민환이 하고, 나는 무식하게 작가들 휘두르면서 시나리오 맘에 안 들면, 야, 다시 써와, 이런 식으로. 근데 어느 시점이 되니까 시나리오가 재미있어지더라.
어떤 면이 재미있었던 건가.
영주라는 인물이 확 보이더라. 재미삼아 콘티를 몇장 그려봤는데 인물이 막 움직이는 것 같았라. 그래서, 이건 여자가 주인공이고 멜로물이지만 내가 해봐도 되겠다, 아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도 시나리오를 봤나.
-당연히 봤지, 우리 회사 대주주인데. 허락을 맡으려고 보여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조민환과 나를 앞에 앉혀놓고 “너희들 딴엔 팬티를 벗겠다고 달려든 거 같은데 빨간 내복을 목에 꽉 끼도록 입고 있네” 이러더라.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그래서 고민 많이 했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건가.
“만약에 네가 주제넘게 코미디를 해야 된다면 코미디를 보여주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법을 택해야 되지 않겠냐. 적당히 타협하려고 하고 품위도 좀 남기면서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더라. 물론 들을 땐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일리있는 말이다. 일단 차승재는 선수다. 나나 조민환보다 수가 높다. 그리고 대주주고 그러니까….(웃음) 귀담아 듣긴 했지.
영주라는 캐릭터에 어떤 특별한 매력을 느꼈나.
처음 시나리오상에는 영주가 영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영주라는 캐릭터만큼이나 부각돼 있었고, 고쳐지면서는 영주와 문수 사이의 멜로가 부각됐다. 시나리오가 그런 식으로 바뀌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건 애초에 내가 영주라는 인물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영주는 좀 모자라고 자신감도 없고, 주목받지 못하는 인생이다. 그러나 모든 주목받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축복인 건, 본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실제로 그런 친구들과 얘기를 해보면 정작 자신들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에게 다른 식으로 받아들여지니까 결국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맞춰준다는 게 대부분이다. 영주도 말하자면 그런 앤데, 그런 애가, 그것도 영어를 굉장히 못하는 애가 영어를 배운다는 게 재미있더라. 영어를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애가 배워야만 한다는 상황에 빠진다면 말이다.
내가 관심을 가졌을 무렵의 시나리오는 착하지도 선하지도 않고, 어중간한 성격 그대로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영주의 상상력이 적당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 인물은 늘 그런 캐릭터가 아니라 우리가 그런 캐릭터라고 규정한 장소에서만 그런 식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영주도 직장에선 굉장히 얌전하고 조용하다. 집에서는 보통 말괄량이 딸처럼 굴고. 그런 모습들이 잘 조화가 돼 있었다. 정말 바보 같은 애가 아니라, 어디선가 본 듯하고 내가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도 다 발견되는 그런 요소를 갖고 있는 인물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 저런 못난이가 영어도 배우게 되고 연애도 성공을 하면, 관객이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부터 영주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럼 세상이 좀 공평해지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웃음)
여자 캐릭터를 잘 그리는 감독이 아니지만, 어차피 영화를 계속할 거라면 도전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런 생각은 안 했다. 내가 여자를 잘 못 그리니까 여자를 한번 그려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내가 잘 모르는 걸 하면 현장에서 늘 헷갈리니까. 그래서 오히려, 여자를 중요하게 안 다루면 되지, 라고 늘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번엔 좋은 시나리오를 만났으니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다른 한편으로는 <태양은 없다>는 약간 다르지만, 대체로 비극적인 결말을 가진 영화들만 해오다가, 이번엔 해피엔딩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는데.
그것도 다르다. <무사>를 찍으면서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 같다. 내 한계의 끝도 봤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거기서 온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피로감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대대급이나 연대급 프로젝트만 해오다가 사단급 영화를 하면서도 연대장 두명이 현장을 다 이끌어 가려니까 현장 자체가 지옥 같은 면이 있었던 거다. 조민환이나 나나 끝까지 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좀 즐겁게 영화를 찍고 싶었다. 내 영화 중에 코미디영화는 없지만 <태양은 없다>에서 몇 장면 나오는 코미디처럼 느슨하게 찍었던 부분이 다시 보면 재미있기도 하더라. <영어완전정복>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게 찍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농담도 하고 재미도 있고, 배우들이나 스탭들한테도 소리 안 지르고, 욕도 안 하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고 있나.
(이원준씨를 부르면서) 너, 내가 현장에서 욕하는 거 들어본 적 있냐?
-없어요.
-정말 없지?
-네, 정말 없어요. 분위기 아주 좋아요. (웃음)
-현장에서 내가 성질 죽이면서 찍으니까 현장은 화기애애한지 안 한지는 전혀 모르겠고 내가 내 감정 억누르느라 스트레스 받아서 지금 뭘 찍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더라. 그러다 10회차 촬영하던 날,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막 소리를 질렀다. 사실 우리 현장에 나말고 욕쟁이가 한 명 더 있다. 김기철이라고 작업했던 미술감독인데, 내가 그 친구한테 “나 이번 영화에서 욕 안할 거야” 이랬더니 “어 그래요, 형? 나도 욕 안 할 건데” 그러기에, “야, 니가 욕을 안 하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그랬다. 그러니까 저도 장을 지진대. 그래서 그럼 먼저 욕하는 사람이 담배를 사서 사람들한테 돌리기로 했다. 그러고선 서로 욕 안 하고 참고 있었는데 그날 내가 먼저 터져버린 거다. 그래서 아, 게임은 끝났구나, 그러고선 다음날 조민환이랑 현장에 나왔다가 내가 담배를 사가려고 했더니 조민환이 왜 사냐고 묻더라. 그래서 “어저께 내가 욕했잖아” 그랬더니, 내가 욕을 안 했다는 거라. “아니 내가 화아악, 터졌는데 왜 욕을 안 했느냐” 하고 물어봤더니 자기도 그때는 아, 저 인간이 드디어 때가 됐구나, 10회 만에 터지는구나, 그랬는데 정작 욕을 안 했다는 거였다. 나는 내가 분명히 욕을 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근데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안 했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진짜 욕을 한 게 아니라, “야, 그러면 어떡하니이∼. 그러면, 이상하잖아아∼” 이랬던 거다. (모두 웃음) 그래서 요즘엔 나 자신도 놀라고 있다. 근데 그건 사실 내가 잘 참아서가 아니다. 찍어야 하는 장면이 유쾌하고 우스꽝스럽고 하니까 내가 욕해버리고 나서 갑자기 표정 싹 바꾸고 “야, 재미있게 하자∼” 이러는 게 되게 어색할 거란 생각을 늘 하는 거다. 아무튼 뭐, 현장이 화기애애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내가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압도하고 그러지는 않는 것 같다.
캐스팅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이나영을 생각했다고 하던데.
실제로 만나보니 화면 속의 이미지처럼 깜찍하고 귀여운 소녀가 아니라 털털하고 엉뚱한 면이 많더라. 성실한 배우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또 말이 별로 없고 되게 똑똑한 친구 같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내 입장에서는, 상투적인 건 아니고 좀 다른 의미지만 이미지 캐스팅을 한 거라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서 미팅도 많이 하고 리딩도 많이 했다. 초반에 만났더니, 시나리오도 재미있게 봤고 자기가 이 역에 적합할 거란 얘기도 미리 들어서 알지만 시나리오를 보고선 당혹스러웠다고 하더라.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사실 코미디영화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영화를 주의깊게 보지도 않고 코믹한 장면의 연기를 고민해본 적도 없다고, 코미디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감독을 믿으니까 전적으로 의존해서 해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니가 들어서 알겠지만 나도 여자 캐릭터를 못 다루는 감독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본인이 잘할 자신이 있으면 하고 아니면 안 했으면 좋겠다고 그랬다.
정말 그렇게 말했나.
그렇다. 그러고선 둘이 같이 인물을 잡아갔다. 대신 내가 전제는 하나 줬다. 이게 코미디영화니까 코믹하게 접근해야 한다, 라는 생각은 버리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인물에 접근해서 본인이 해석을 해라, 라고 주문했다. 난 이나영이 영주라는 인물과 굉장히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나영은 신중한 사람이고 영주와 많이 다르다. 그리고 영주는 아주 특이할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보편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 전제를 내줬는데 만날 때마다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그 말 듣고 속에선 열이 났는데 사실 나도 별 생각이 없으니까, 둘이 서로 구름 잡는 얘기만 하고 헤어지고 그랬다.
그런데 이나영이 리딩을 하다가 세 번짼가 네 번짼가 리딩할 때, 두어 군데에서 굉장히 웃겼다. 그래서 그거 엄청 웃긴다, 니가 웃기게 한 거냐, 하고 물어봤더니, “이럴 수도 있지 않냐” 그러더라고. 그렇게 본인이 해석하는 영주가 나오더라. 그게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재미있었다. 현장 가서는 더 잘했다. 준비된 게 아주 많았고 스탭들 반응도 좋았다. 그러다보니 본인도 점점 확신을 갖고 그런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들을 자신있게 하더라. 사실 스탭들이 되게 냉정하다. 특히 나처럼 무서운 감독 밑에서 일하다보면. (웃음) 사람들이 감정 표현을 잘 안 하게 되는데 자기들도 웃기니까 이나영 연기하는 거 보면서 웃더라. 시나리오의 영주를 보는 거 같다고 그랬다.
만화적인 요소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 걸 많이 의식하고 연출을 하는 건가.
사실 이 영화 자체가 그런 요소를 갖고 있어서 그런 걸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일전에 <리니지>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전통적인 2D애니메이션도 많이 보고, 애니메이션에 홀딱 빠졌던 탓이 있다. 지난해 초까지. 그런 걸 많이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써도 되겠더라. 영주가 가진 상상력이나 판타지 같은 건 만화적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2D방식이 아닌 플래시애니메이션이나 3D를 사용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분량이 너무 많지 않냐고도 하는데, 영화에서 어떤 기법을 쓸 때 이게 맞나 안 맞나를 고민하면 자꾸 주저하게 된다. 할 거면 일단 자신감을 갖고 무식하게 써야 보기에도 민망하지 않다.
리메이크 판권 얘기도 나왔겠다.
일본쪽에서 그랬다. 영어 배우느라 고생하는 게 다 비슷하잖나. (웃음) 그쪽 사람들이랑 프로젝트 얘기 오가다가 나보고 지금 뭐 하냐고 묻기에 “플리즈 티치 미 잉글리시” 한다고 그랬더니, 어떤 내용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이런이런 내용이다 그러니까, 다들 우와, 재미있겠다, 그러더라. (웃음)
인터뷰를 마치자 근처에 있던 나비픽처스 대표 조민환씨가 합석했다. 감독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는 “이거 를 찍는 거 같아”라며 은근히 돈에 눈먼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기획과정이나 시나리오는 흔히 보는 로맨틱코미디와 다르지 않지만 김성수 감독이 개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액션이나 컴퓨터그래픽 분량도 적지 않고 플래시애니메이션도 들어간다며. 하지만 정작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김성수 감독다운 촬영 테크닉은 아닐 것이다. 웃음을 만드는 테크닉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 다른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이번에 김성수 감독이 도전하는 진짜 목표다.글 남동철 namdong@hani.co.kr, 박혜명 na_mee@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