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 초등학교 5학년짜리 딸이 <동갑내기 과외하기> 비디오를 빌려왔다고 보자고 한다. 굳이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보자고 한다. “워낙 구하기 어려운 비디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몇번이나 비디오가게에 갔다가 모두 대여 중이라 허탕쳤는데 자기 친구가 운좋게도 마침 반납하는 비디오를 만나 빌려왔다고 해서 친구들끼리 돌려보는 중이라는 제법 긴 입수경위를 듣고 보니 그렇게 귀한 비디오를 나도 한번 꼭 보고 싶다는 의욕이 동했다. 전국 400만의 영화라면 최소한 그 관객동원력에 대한 경외심으로라도 봐야겠지. 게다가 공짜로 빌렸다잖아?
다 알다시피, 이건 고등학교에서 ‘짱’인 남학생과 가난한 여대생이 과외학생과 선생으로 만나서 지지고 볶다가 마침내 연인이 되는 얘기다.
영화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이미 나는 이것이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짜리 딸 둘과 함께 관람할 수 있는 영화로서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5분에 한번꼴로 주인공 여자가 성희롱당하고 수치심을 맛보는 장면을 보여준다. 김하늘은 열등감과 비굴함의 다양한 표정들을 연기한다. 아이들은 벌써 비디오 화면에 코를 박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아이들이 이 석연치 않은 오락에 몰두할 수 없도록 ‘소격효과’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이거 좀 이상한 영화네.” “저게 뭐야. 감독이 여자를 아주 우습게 만들고 있잖아.”
깡패 남학생이 뭔가 ‘깨달음’을 얻고 과외선생한테도 고분고분해지는 교육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으냐고 한다면, 낯간지러운 얘기다. 영화는, 스토리가 아니라 이미지가 더 강력한 메시지인 그런 매체다.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짰든 간에 이 영화는 러닝타임의 80% 정도를 터프한 남자의 매력에 탐닉한다. 말하자면, 남성미의 신화를 재건하는 영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장면. 남자주인공 권상우가 패싸움하다가 복부에 상처를 입고 돌아왔을 때 김하늘이 돌연 얌전하고 다소곳한 나이팅게일이 돼서는 권상우의 배에 붕대를 감는다. 권상우는 처음으로 상반신 누드로 나오는데 카메라는 떡 벌어진 어깨와 우람한 근육을 부감으로 클로즈업하면서 선망의 눈길로 쓰다듬는다. 카메라가 군침 삼키는 소리가 거의 들릴 정도다. 이 대목에서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무슨 저 따위가 다 있어.”
예전에 내 친구의 친구 중에 아주 책임감 강한 어머니가 있어, 고단백식품 1일 필요량만큼 소고기 상등품을 꼬마저울에 달아서 조리하고, 모든 식료품은 유기농으로 따로 구입하고, 아이들 책은 미리 오자를 고쳐서 읽어주고, 심지어 번역서는 원서를 입수해 오역을 고쳐서 읽히고, 그러다가 마침내 병원에- 물론 정신과였지만- 입원했다는 얘길 들은 적 있다. 나는 아이들 교육에 관한 한, 동네 공립학교에서 가끔은 선생님한테 매도 맞아가면서, 슈퍼마켓에서 사오는 각종 식료품들을 적당량의 방부제와 발색제와 함께 섭취하면서, 그렇게 평균적인 현대인으로 살아가도록 키우는 쪽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섭취하는 문화 속에 어떤 종류의 차별을 조장하는 물질이 들어 있다면,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홧김에 나는 영상물등급위원회를 원망한다. ‘폭력과 섹스’의 기준만 통과하면 ‘12세 관람가’를 주는 등급분류기준이 불만스럽다.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건, 피 튀기는 폭력보다도 이처럼 저강도로 스며들어오는 문화폭력이다. 타란티노나 히치콕만 성인용인가. 이렇게 문화폭력의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는 영화야말로 사회적 병리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성인들만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왜 등급위원회가 이런 ‘청소년 유해환경’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 이건 말하자면, 뇌세포를 공격하는 영혼의 발암물질인데 말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무수한 <동갑내기 과외하기>들이 아이들 체내에 떨궈놓은 독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해독제가 필요했다. 공짜 비디오를 단체관람했던 바로 그 주말 내내 나는 해독제를 구하러 돌아다닌 셈이다.
토요일에는 두 딸을 안티미스코리아대회에 데려갔으며, 일요일에는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여성마라톤에 참여했다. 나는 땡볕 아래 아이들과 함께 월드컵공원을 뛰었다. ‘차별로부터 자유롭게 자녀를 키워보겠다는 것뿐인데, 사회가 협조를 안 해주네’라고 불평하면서.조선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