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담요를 뒤집어쓰고 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비이>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소름이 쫘악 끼쳤지요. 특히 마지막날 코마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을 외면하려 기를 쓰는 장면에서는요. 지금까지 그로테스크한 비주얼과 상상력을 채울 수 있는 어둠이 그처럼 기막힌 조화를 이룬 장면은 영화 속에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여간 <비이>가 남긴 인상은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지금까지 전 책을 읽으면서 그처럼 무서웠던 적은 없었답니다. 물론 요새 나오는 피범벅의 호러소설들의 정도를 생각해보면 <비이>는 그렇게까지 무서운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무서운 작품’과 ‘무섭게 보았던 작품’을 구별하는 거죠. 전 후자야말로 진짜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결국 호러란 단발성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었으니, 이게 제 정신이 박힌 글이라면 당연히 이야기는 마리오 바바의 아름다운 호러영화 <사탄의 가면>(블랙 선데이)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영화의 원작은 <비이>니까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미출시작이군요. 사실 각색 과정중 원작에서 너무 벗어나 원래의 모양을 찾기도 힘들고요. <사탄의 가면>은 <비이>보다는 흡혈귀 버전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이>의 또다른 영화 버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지요. 10년 전쯤, 정우에서 러시아 문학 각색물들을 패키지로 쏟아부었을 때, 이 작품의 영화 버전도 함께 소개되었으니까요. 출시제가 <마녀 전설>이었지요. 제가 알기로, 이 작품은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유일한 러시아 호러영화입니다.
영화를 어떻게 보았냐고요? 실망했답니다. 고골리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지만 <비이> 역시 강렬한 이미지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이 단편을 수십번 되풀이해 읽으면서 전 끝도 없이 머리 속으로 저만의 이미지를 그려댔거든요. 어떻게 보면 67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기술 수준으로는 제가 머리 속으로 만들어낸 영화들에 견줄 만한 작품은 나올 수 없었답니다. 그래도 마녀로 나오는 나탈리아 발레이가 예쁘다고 생각했고 그 사람이 코마의 둘레를 빙빙 돌며 사납게 을러대는 장면들을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거의 몇 개월 전에 우연히 문닫는 비디오 가게에서 이 비디오를 떨이로 파는 걸 보고 우연히 충동 구매를 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보니까 꽤 재미있더군요. 여전히 각색은 뻣뻣하고 특수효과는 약했지만 그동안 이런 결함들을 ‘캠피’한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여유를 익혔던 겁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건 전혀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문화적 전통을 따져본다면 러시아는 훌륭한 호러영화의 산실이 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와서 그 유산을 제대로 이용한 러시아영화는 거의 없었지요. 오히려 그런 유산을 물려받아 꽃피운 사람은 햇빛 찬란한 이탈리아의 영화인인 마리오 바바였습니다. 그의 초기 고딕 호러영화의 반은 러시아 문학의 분위기를 따르고 있었으니까요. <사탄의 가면>과 <마녀 전설>을 번갈아 보면서 참 세상은 아이로니컬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더군요. 우리가 후손을 정할 수는 없는 법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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