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항!”
“옙!”
그 사람이 체포되던 날, 우연히 조·중·동 세 신문을 다 보았는데 그 가운데 동의 묘사가 압권이었다. 기자는 이렇게 썼다. “비록 탈영병이지만 아직은 현역 군인의 신분임을 잊지 않았던 탓일까. ‘희대의 도망자’ 박노항 원사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반사적으로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원기왕성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언젠가 읽었던 문화평론가 이재현의 글이 생각났다.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이 하나의 의미있는 글쓰기로 자리잡던 90년대 초의 글로 기억하는데, 이재현은 사람의 내면에 깊이 침전된 문화의 자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설명하면서 취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예로 들었다. 아마 그 자신의 예로 짐작되는데, 뒤풀이에서 운동가를 소리높혀 부르다가 노래방으로 가서는 뽕짝이 튀어나오고 그 길로 3차, 4차를 더해 새벽녘 뒷골목에서 토악질을 하면서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이나 ‘새벽 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같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압도한 노래가 아무런 자기 검열도 없이 흘러나오더란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가 되는가. 내면의 깊숙한 곳을 채우고 있는 어떤 것(트라우마?)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의식의 작용에서나 가능한 허위일 뿐 무의식의 지층에 단단히 박힌 뿌리를 뽑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인가. 거꾸로 자신의 뿌리, 근원, 의식의 퇴적층을 더듬고 그 불쾌한 냄새까지 흠향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 아닌가.
임순례 감독이라면 어떨까. <우중산책>과 <세친구>, 그로부터 역시 3년여,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돌아온 임순례 감독은 우선 상당히 유연해졌다는 점에서 기대에 답한다. <세친구>의 주인공들이 청소년으로서 학교의 틀에 얽매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한다면 서른이 넘은 성인들이 주인공인 <와이키키…>가 그 호흡과 정서, 거주의 공간과 기로의 선택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연한 보폭을 보인 것은 당연한 사실의 하나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것은 ‘운명의 아이러니’를 대하는 임순례 감독의 겹눈이 더욱 깊어졌다는 사실이다. 차마 입으로 전하기도 낭패스런 상황을 슬그머니 겹쳐놓고 감독은 뒤로 물러선다. 주·조연이 모두 상처투성이임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도록 임순례는 끝없이 거리계를 조율한다. 거주 공간과 기로의 선택이 비교적 자유롭다고 앞에서 말했지만 그들이 처한 영화적 공간(프레임)은 여전히 담담하다. 클로즈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마치 길 건너 싸움 구경하듯이 카메라는 물러서 있는데 그것은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극명하게 ‘수미쌍관’으로 사용되면서 ‘보라, 그들은 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물론 <와이키키…>는 부분적으로 낭패스런 대목이 없지 않다. 1t짜리 야채트럭이 언덕길을 오르다가 ‘속도위반’에 걸리는 장면은 아주 사소한 실수일 뿐이지만 그 장면의 예언을 이어받는 영화의 마무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망설여진다. 속도위반 장면에서 주인공은 억척스럽게 삶을 살아나가는, 어릴 적 첫사랑의 현실을 보게 된다. 교통경찰의 단속쯤이야 능청과 우스개로 이겨나가는 그녀는 영화 마무리에 이르러 ‘바다 구경한 지 참 오래됐다’는 말과 더불어 주인공의 밴드 생활에 동승한다. 거칠고 남루한 삶이지만 거역할 수 없는 영혼의 명령이 두 사람을 나이트클럽 무대에 오르게 한다. 여자가 1절을 부른 뒤 기타 반주를 하는 주인공을 본다. 주인공 역시 그녀를 바라본다. 그런데 웃는다. 물론 호호깔깔은 아니지만, 서로를 격려하면서 둘은 웃는다. 그리고 2절을 마저 부르며 카메라는 물러서고 영화는 끝난다.
왜 웃었을까. 전작 <세친구>의 마무리는 귀를 다쳐버린(세상과의 소통이 강제로 막혀버린) 주인공 섬세가 시장 골목 깊숙이 사라지는, 뼈아픈 여지를 남기며 끝났다. 이번에는 웃는다. 시사회 뒤, 감독에게 물었다. “굳어 있었다. 그래서 웃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웃는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상처입은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후속 작품으로도 이어지는가, 또 물었다. “아직 모른다. 하지만 조금은 경쾌하게 걷고 싶다.” 돌아오며 생각하니, 실로 우문현답의 생생한 증거가 아닌가. 한줄기 빛도 없는 동굴 깊숙이, 그곳에 침점된 어떤 상처와 의미를 거두기 위하여 임순례 감독은 이제껏, 그리고 앞으로도 ‘쭈욱’ 갈 것이며 다만 그 리듬이 다양하게 변주될 뿐이다. 그럴진대 그 앞날을 위하여 주인공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웃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흐뭇한 미덕이 아닌가. 그날 밤 OCN에서는 루이 말의 <데미지>를 ‘또’ 해줬다. 격정의 찰나를 마친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쉬. 그 정지된 순간 어디쯤에서 비노쉬가 말한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위험해요.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으니까요.”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