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장 비고 요절하다
픽션 영화로는 장 비고가 처음으로 만든 <품행 제로>는 제작이 끝난 후 1945년까지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던 작품이다.
아깝고 안타까운 죽음이다. 1934년 10월5일 프랑스의 청년감독 장 비고가 결핵성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살이다. 몇주 전 개봉한 그의 두 번째 장편극영화 <라탈랑트>가 그의 유작이 됐다. 비고는 <라탈랑트>와 함께 죽었다. 폐결핵을 앓던 그는 무슨 작심이나 한 듯 혹한의 겨울에 이 영화를 찍었고, 촬영을 하면서 “나는 <라탈랑트>로 나 자신을 죽이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병상에 누워 있느라 생명을 걸고 만든 이 영화의 최종 편집본을 보지 못했다. 편집자 루이 샤방스(Louis Chavance)가 혼자 <라탈랑트>를 편집했고, 배급사인 고몽-FFA가 시사회 관객의 반응을 고려해 상당수의 장면을 삭제한 뒤 최종 편집본을 완성했다.
그래도 관객과 조우할 수 있었던 <라탈랑트>의 운명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의 극영화 데뷔작인 <품행 제로>(1933)는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시골 기숙학교에 다니는 네명의 남학생들의 ‘반란’을 그린 이 영화는 “종교와 교육제도에 대한 신랄한 조롱으로 사회질서를 교란시킨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품행 제로>는 문제아로 10대를 보낸 그의 경험이 녹아 있는 영화다. 그는 열두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과격한 무정부주의자인 아버지는 감옥에서 누군가에게 교살된 채 발견되었다. 이후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는 학교 기숙사에서 <품행 제로>에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문제아들과 어울리며 10대를 보낸다. 비고는 소르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 1928년 촬영감독 레옹스 앙리 뷔렐의 조수로 영화에 입문했다. 1929년 지가 베르토프의 동생인 보리스 카프만과 의기투합해 만든 다큐멘터리 <니스에 대하여>가 그의 첫 번째 영화다.
단 신 들
중국 최고 여배우 완령옥 자살
1935년 3월8일 중국 최고의 여배우 완령옥이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물다섯살이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죽어도 아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세상의 풍설이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이 사회가 두렵다”라고 적었다. 그가 말하는 ‘세상의 풍설’은 옛날 애인 장달민이 언론에 폭로한 그와 장달민, 새 애인 당계산이 얽힌 연애 스캔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장달민은 완령옥이 자신과의 결혼을 해소하지 않고 당계산과 동거했다고 주장했다. 스캔들로 절망에 빠진 그는 <신여성>의 감독 채초생과 결혼해 홍콩으로 떠날 생각이었으나 이 청혼마저 거절되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하이에서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주인공이 자신의 직업 때문에 사회에서 낙인 찍힌 아들을 위해 투쟁한다는 내용의 <신녀>(神女, 1934)가 완령옥의 유작이다.
더들리 니콜스 최초로 아카데미상 거부
1936년 5월5일 미국. 제9회 아카데미에 이변이 벌어졌다. 각색상 수상자인 <밀고자>(The Informer)의 더들리 니콜스가 아카데미 사상 처음으로 수상을 거부한 것이다. 또한 니콜스는 같은 영화로 감독상을 수상한 존 포드와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이콧했다. 이들이 이러한 행동을 선택한 것은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소속 제작자들과 노사 분규를 벌이고 있는 다양한 영화인협회들에 대한 연대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1927년 설립된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MGM 대표 루이스 메이어 등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주도한 단체로 아카데미상 선정 이외에 미국영화를 기술적, 교육적, 문화적으로 표준화한다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카데미의 궁극적인 노림수는 할리우드 내 노동조합들이 더 높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해오는 데 대한 집단대응이라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노조 소속 영화인들의 비난도 거세졌다. 한편, <밀고자>는 1922년 아일랜드 혁명기를 배경으로 돈을 위해 아일랜드 공화군 동료를 배반하는 한 남자의 고통과 죽음을, 이제는 ‘고전’이 된 독일 표현주의영화풍으로 그린 영화로, 아카데미에서 감독상과 각색상 이외에 남우주연상과 최고음악상을 수상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설립
1936년 9월2일 프랑스. 무성영화를 보존하기 위한 비영리단체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설립됐다. 앙리 랑글루아, 조르주 프랑쥐, 장 미트리는 무성영화 프린트의 손실을 방지하고 영화라는 자산을 후대에게 자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영화보관소가 필요함을 깨닫고 지난해부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을 추진해왔다. 한편 미국에서는 1935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산하에 영화 라이브러리를 설립했으며, 영국 또한 같은 해 런던 필름 소사이어티를 열었다. 이 영화보관소들은 <대열차 강도> <국가의 탄생> 등 주로 할리우드와 유럽의 무성영화 고전들을 수집하고 있다.
<밑바닥 인생> 제1회 루이 델뤽상 수상
1936년 12월22일 프랑스. 제1회 루이 델뤽상 수상작에 장 르누아르 감독의 <밑바닥 인생>이 선정됐다. 이 상은 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네아스트’ 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영화이론가 루이 델뤽을 기리기 위해 모리스 베시 등의 젊은 평론가들이 제정했다.
미국 동시상영 일반화
1935년 미국 대공황으로 인한 관객 감소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된 동시상영이 일반화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전국 극장의 85%가 장편영화 2편, 여기에 만화와 뉴스릴 등을 포함한 프로그램을 동시상영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관객을 유인하기 위한 것으로 1930년 유성영화 도래 직후 9천만명에 이르던 주간 관객이 32년에는 6천만명으로 줄었으며, 1935년에는 미 전역의 극장 1만6천개 가운데 5천개가 문을 닫는 등, 대공황과 함께 관객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