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관객이 새로운 감각을 느끼길 바란다.
일본 퀴어영화 감독 오키 히로유키가 특별전을 계기로 한국을 찾았다. 오키 히로유키를 초청한 이번 특별전의 프로그래머 서동진씨가 대담자로 나섰다. 아직까지 한국에는 정식으로 소개된 바가 없지만, 오키 히로유키는 일본 퀴어영화 진영의 중심에 서 있는 감독이다. 1990년 이미지 포럼 영화제에서 <수영금지>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린 오키 히로유키는 야마가타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일본을 대표하는 실험영화 감독으로서 많은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대표작으로는 <천국의 여섯개의 상자> <네가 좋아, 네가 너무 좋아> <G8> 등이 있다. 오키 히로유키와 서동진씨는 공간, 몸, 기억을 통과하며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일본 퀴어영화의 자유로운 실험가 오키 히로유키를 소개한다.
# 공간
서동진(이하 서) |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데, 삶은 이야기인가? 감각인가? 말하자면 당신은 건축학을 전공했다. 나는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이미지를 건축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당신의 영화에서 늘 느끼는 것은 공간의 문제이다. 그런데 당신의 영화에서 상정하는 공간은 물리적이고 서구적인 공간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인 것 같다. 당신에게 공간이란 무엇인지 굉장히 궁금하다.
오키 히로유키(이하 오키) | 일단 공간은 사람이 사는 장소다. 우주도 공간이다. 그것이 전제가 된다. 공간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다. 공간 없이는 호흡도 할 수 없다. 반드시 공간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 | 그럼 당신이 건축학에서 배운 공간과 인간의 체험이 깃들어 있는 공간은 어떤 차이인가.
오키 | 예를 들면 건축을 디자인하는 등의 문제는 나의 관심이 아니다. 건축의 공간이란 바로 라이프이다. 지금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는 이곳도 디자이너와 목수가 만든 공간이지만, 그 사람이 만든 공간에 우리가 있다는 건 의미가 다른 것이다. 여기에 카메라를 들이댄다면 건축가가 만든 공간과 다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그 체험적인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 | 내가 알고 있기에 공간은 행위와 사건의 배경이다. 그런데 당신의 영화에서는 그 공간이 모두와 결합되어 있는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공간에 대한 체험이 오키 감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오키 | 한자로 공간은 사이 간자를 쓴다. 바로 그 사이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사이는 언제나 존재한다. 카메라가 있고 대상이 있으면 그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거리뿐만 아니라 사이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 공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회화로는 보여주기 힘든 점이다.
서 | 내가 보아왔던 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는 단순하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풍부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장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장소에 대한 감각성이 당신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오키 | 반복되는 부분인데, 공간이란 카메라 대 사람이 아니다. 카메라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이는 관계도 아니고 거리도 아니다. 컷과 컷 사이에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사이를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점을 은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의 목적이다. 현대사회는 그 자체가 영화적이다.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나의 작업이다.
서 |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거리도 있고, 컷과 컷 사이의 거리도 있다. 우리는 카메라와 대상 사이를 공간이라 부르고, 컷과 컷 사이를 시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 둘을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오키 | 공간이 있으면 언제나 시간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걸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공간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몸이기도 하고, 목소리이기도 하다. 단순히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음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 몸
서 | 우리가 알고 있는 카메라는 눈, 즉 원근법으로서의 눈이다. 하지만 당신의 카메라는 항상 몸이다. 멀고 가까움을 재는 도구가 아닌 공간을 체험하게 하는 독특한 기계이다. 당신에게 있어서 카메라가 항상 몸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키 | 카메라는 손이기도 하고, 물리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이번에 출품한 <G8>에 그런 경향이 있다. 카메라를 통해 본다는 건 종교이기도 하고, 페티시즘이기도 한 것이다. 설명하기는 좀 곤란한데.. 그러니까 카메라 자체는 제국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바로 이 공간에 카메라를 대면 공간은 변해버리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 변형을 담아내는 것이다.
서 | 당신의 영화에서 많은 소년들이 고정된 채 비쳐진다. 그런데 그것은 초상이 아니라 마치 카메라로 만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미 당신의 카메라와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많은 영화들은 우리가 성행위라고 표현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당신은 성행위를 통해서 드러날 수 없는 몸의 성질을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점이 오키의 영화가 갖고 있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아주 중요한 영화적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키 | 여기 그림이 있다고 치자. 그 그림에 성행위 장면이 그려져 있다고 하자. 성행위 자체가 그려져 있다고 해도 본질적인 섹슈얼리티의 의미와는 다르다. 이야기 전달상의 섹슈얼리티도 있겠지만, 나는 카메라와 대상이 성행위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페티시즘이라는 말을 아까 했는데, 이건 바로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카메라를 보며 흥분을 느끼는 걸 변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극단적인 표현이 영화가 갖고 있는 복잡성, 또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사회에는 텔레비전이 있다.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거지만 사실 그건 텔레비전에 의해서 우리가 강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개인적인 새로운 모럴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성희롱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서 | 많은 서구의 게이영화들은 동성애를 정상화시키려 하고 있다. 정상적인 욕망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 서구영화의 경향이다. 그런데 당신은 영화에서 새로운 윤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서구의 급진적인 지식인, 푸코 같은 사람들은 마이너리티 사회에서 윤리성을 찾으려고 했다. 당신은 관습적인 퀴어영화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퀴어영화란 무엇인가.
오키 | 퀴어가 반드시 섹슈얼리티의 문제만을 다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서양사회에 비교하면 일본도 마이너리티이다. 퀴어영화는 유니크한 점을 찾아야 한다. 그걸 어떻게 사회적으로 위치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불어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퀴어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서 | 게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정체성을 가정하고 쓰는 것이다. 퀴어라는 용어는 그 일반성과의 차이를 가정하는 것이다. 차이를 강조하는 퀴어라는 의미를 당신은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일본적인 것을 찾고 있다고도 말한다. 일본적인 것이란 언제나 국민적인 같음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상당히 엉뚱하게 들린다. 그렇다면 내셔널리티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키 | 그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나의 영화는 서구의 퀴어영화와 분명 다른 점이 있다. 내 영화는 게이적인 요소가 있다. 나 스스로 게이이다. 또 일본인이기도 하다. 게이인가 일본인인가 묻는 것은 같은 질문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애리조나, 티베트, 오카야마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그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내셔널리티의 의미 자체가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와서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 고치현에 살고 있는데, 국가가 아닌 하나의 지역적 ‘풍토’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아닌 현, 그 안에는 분명한 코뮤니티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 | 풍토로서의 사회라는 표현이 상당히 흥미롭다. 이건 정서적으로 결합된 사회를 가리킨다. 게이 코뮤니티는 특정한 장소에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풍토로서의 사회와 게이 아이덴티티로서의 사회는 어떤 점에서 통하고 있는가.
오키 | 섹스라는 표현이 한국에도 있는가? 성교라는 표현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잘 안 쓰는 표현이다. 왜 물어봤냐하면 성교라는 한자어는 아시아적인 말이다. 하지만 섹스는 일반화된 외래어이다. 게이라는 말도 외래어이다. 이 말이 일본에 들어온 지는 10년밖에 안 된다. 서구에서는 운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건 정상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정보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만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본질성이 바로 풍토로서의 사회다.
# 기억
서 | 나는 오키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생각난다. 그 사람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소설로 썼다. 당신의 영화를 볼 때마다 정보와 이야기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감각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영화는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감각을 다루는 당신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관객을 촉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오키 | 감각은 모든 것에 통하게 마련이다. 굉장히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서 극장을 나서면 세상이 빛나 보이고, 활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내 영화에서 그런 것을 다루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이 빛나게 보인다는 건 극장의 어둠 속에서 본 영화가 이미 완결됐다는 의미이다. 내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바라는 것은 자극을 주어서 지금까지 활동하지 않았던 세포들을 활동하게 하거나, 새로운 감각을 감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관객에게 바라는 것이다. 내 영화를 보고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을 하는데, 그건 오히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문을 계속 유지해서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 그게 내가 관객에게 바라는 바다.
서 | 내가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사랑하는 표현은 플래시백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화는 시간의 되돌림을 물질적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오키 감독 역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건 개인적인 기억이 아니라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에 나오는 기억에 가깝다.
오키: 기억이라는 건 하나의 전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유전자의 기억은 평생 생각 안 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한다. 볼 때는 몰랐는데 갑자기 알게 됐다고. 그건 하나의 유전자의 기억이다. 영화는 하나의 기억이고, 기록이다.
서 | 나는 당신 영화의 기억이 당신 개인의 기억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촉발되는 방식은 나의 기억이다. 내가 잊고 있었던 구체적인 감각들이 되살아나는 방식이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기억을 당신의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이라고 고쳐 읽어도 무방하겠는가?
오키 |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나 스스로는 기억을 찍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을 찍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리 정한석 기자 mapping@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