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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의 <와일드카드> 제작일기 [1]
권은주 2003-05-16

정진영, <와일드카드>와 함께한 15개월의 기록

배우가 제작기를 써서 보내오기란 쉽지 않다. 스케줄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일지를 쓸 만한 여유가 있겠는가. 여기에 제작기간이 1년이 넘는 영화라면, 후일 기억을 더듬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와일드카드>의 맏형인 정진영씨가 제작기를 보내오겠다고 했을 때 드는 의구심은, 사실 또 있었다. 개봉을 앞둔 시점이다보니 자칫 “영화를 홍보하는 멘트가 많지 않을까” 하는 우려. 물론 기우였다. 정진영씨가 보내온 기록은 “힘들었다, 그래도 우린 해냈다”는 식의 상투를 넘어 솔직하고 담백한 관찰기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캐스팅된 뒤 15개월 동안 촬영현장에서 보고, 듣고, 겪은 사람들에 대한 그의 가감없는 ‘고백’을, 여기 싣는다. - 편집자

옛, 감독님

2002년 2월_인사동 모 술집 >>

“이제 책이 나올 것 같다. 니가 할 거 있다. 여름 지나면 찍자. 너 손해볼 일은 없을 거다.” 영화 <와일드카드>와 나는 이렇게 만났다. 당시의 원제목은 ‘작업’. 형사 이야기란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김유진 감독. 그의 영화 <약속>으로 나는 영화배우로서 밥을 먹게 되었다. 이야기는 짧게 끝났다. “예. 감독님.”

여기서 더 하면 구질구질해

2002년 5월_진관외동 감독님 댁 >>

어느 일요일 오후. 감독님이 호출을 했다. ‘책 나왔다. 와서 봐라!’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를 준비한다는 것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어떤 이야기를 할까’를 정하고,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를 정하고, 그리고 그 지루한 구상과 조사와 집필기간을 거쳐 한편의 시나리오가 나온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서도 감독 스스로 아니다 싶어서 덮는 경우가 태반. <약속> 이후, 김 감독은 이만희 작가와 함께 3년간 책작업을 해왔다. 여러 개를 쓰고, 또 스스로 덮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산고 끝에 책이 나온 것이다.

배우가 작품을 거절할 때는 ‘작품은 좋은데 저랑은 안 맞습니다’라고 하거나, ‘작품은 죽이는데, 이런! 스케줄이 안 되네요’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게 예의다. 하지만 작품을 하기로 한 경우는 다르다. 자신이 시나리오에서 느끼는 문제점이나 의혹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해결점을 찾는다.

“형사 이야기란 게 좀 뻔하지 않은가요?”

“아니, 이 이야기는 무지하게 재미있는 이야기야. 이 영화는 <약속>보다 재미있을 거야.”

“형사들의 애환이 더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아니, 더 들어가면 구질구질해져. 더 꾸밀 필요가 없어. 더 꾸미는 것은 비겁한 일이야.”

“캐릭터가 좀 전형적이어서, 배우 캐스팅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아니, 이거 안 하겠다는 배우는 바보야. 안 하면 지 손해지. 너 시나리오 되게 볼 줄 모른다!”

게임 셋. 영화는 출발했다.

방제수, 애 좀 그만 태워라

2002년 7월 초_또 인사동 술집

>>

“요즘 배우들은 왜 이렇게 책 주기도 힘드냐?”

방제수의 캐스팅이 힘들단다. 한국영화의 제작공식은 단순명쾌하다. 그 해답은 배우! 이른바 스타배우를 캐스팅하면, 시나리오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영화는 만들어진다. 스타가 포진 안 되는 영화는 투자자로부터도 외면받는다. 하지만 스타들이 좀 바쁜가. 기다리고 있는 영화들이 좀 많은가. 봐야 할 시나리오가 좀 많은가. 방제수 역할은 신참형사. 캐스팅의 지형이 뻔하다. 젊은 스타들은 이미 대부분 스케줄이 차 있고, 책을 받은 뒤에도 흔쾌히 답을 주지 않는다.

“요즘 배우들은 작가주의영화들을 더 좋아하거든요. 대중적 코드보다, 감독님 스타일을 더 살릴 수 있는 그런 쪽으로 어레인지를 하시면….”

“난 관객을 위해서 영화를 만들어.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난 만들 거야. 물론 작가주의영화도 소중하고 나도 그걸 좋아해. 하지만 내가 만들 영화는 아니야.”

충무로 사람들은 김유진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2002년 한국 영화계에서 그것은 영화제작을 위한 충분조건이 안 된다. 관객이 끌릴 만한 소재와 이야기여야 하고, 관객의 트렌드를 따라가야 하고, 스타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감독 자신이 스타감독이어야 한다.

김 솔로몬의 선택

2002년 7월 말_여의도 포장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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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됐다. 우석이가 돈 댄단다.”

파이낸싱(투자확정)이 됐단다. 그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하다. 캐스팅이 완료 안 된 상태에서 투자가 확정된다는 것, 그것은 거의 기적이다. 게다가 작품이 좋으니 고민하지 말고, 준비되는 대로 곧장 시작하라는 OK 사인. 감독으로서는 투자자에게 최대의 신뢰를 받은 것이다. 파이낸싱이 확정된 감독. 그 희열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와일드카드> 제작준비가 길어지는 줄 알고, 다른 작품 이야기가 오가던 상태였다. 관건은 크랭크인 시점. 캐스팅이 완료 안 된 상태에서 아무래도 ‘와일드카드’가 금방 들어갈 수는 없다. 다른 쪽 영화는 9월 말이면 내 분량이 끝나는 스케줄이다. 감독님께 졸랐다. 어차피 캐스팅하고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두달만 기다려주십사고. 그 영화는 평소 내가 하고 싶었던 유의 영화라고…. 내게 시달린 끝에 그가 말했다.

“솔로몬 재판에서도 애를 두 동강이 내는 것을 원치 않아, 친엄마가 애를 포기하지. 내가 널 포기할게.”

에고…. 나는 다른 쪽 영화를 포기했다.

동근아, 반갑다

2002년 10월 초_유진영화사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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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제수 역이 확정됐다. 양동근이란다. 양동근은 당시 <내 멋대로 해라>라는 TV드라마로 상종가를 치고 있던 배우.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그에 대한 인상은 20대 초반의 시트콤 배우의 그것이 더 강했다. 그리고 자고로 영화의 동성 파트너는 서로 색깔이 달라야 하는 법 아닌가.

“어떠냐?”

“좋은 배우이긴 한데… 나이 차도 너무 나고… 저랑 느낌이 너무 비슷하잖아요?”

“그러니까 좋지. 두 놈 다 범인처럼 생겼잖아.”

첫 미팅. 말이 없고, 눈이 선하다. 스물넷이라는데, 나이답지 않게 묵직하다. 정말 나와 비슷하게 생겼다. 지금은 내 얼굴이 많이 바뀌었지만, 나의 중학교 시절 짧은 머리의 사진이 그의 모습과 아주 비슷하다. 우리의 실제 나이 차이는 15살. 영화 속에서는 8살. 까짓거 배우 나이야 깎고 붙이면 되는 것. 동근이가 지 나이보다 세살 더 먹고, 내가 네살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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