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동네 동시상영관에 가면 영화와 영화 사이에 그 근처에서 좀 한다는 레스토랑의 광고가 꼭 덤으로 주어진다. 거의 다가 여자 성우의 울림소리를 동반한 목소리가 “도시인의 휴식처…”라는 대사를 읊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광고들에 열이면 아홉이면 똑같은 음악이 붙곤 했다. 싱그러운 느낌을 주는 키보드가 마치 물 위를 사뿐사뿐 거니는 예쁜 새를 연상시키는 듯한 메인 멜로디를 풀어내는 이 음악의 제목은, 나중에 가서야 알았지만 <Emotion>. 바로 프란시스 레이의 곡이다. 그는 우리가 ‘경음악’이라고 부르던 장르의 1970년대적인 상투형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지겨워질 정도로 우리 귀에 익숙해진 그 ‘상투형’을 만든 사람이라니, 얼마나 대단한가! 상투형은 우리가 가장 권태로워하는 무엇이지만, 정작 그것의 창출이라는 건 보통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프란시스 레이와 더불어 프랑스가 자랑하는 영화음악가 미셸 르그랑. 그는 1932년 생으로 프란시스 레이와 나이는 같지만 일찍 출세했다. 프란시스 레이가 이탈리아계 부모를 둔 남불 출신의 조금은 막돼먹은 음악가라면 르그랑은 파리 출신에다가 파리 음악원을 수석 졸업한 정통 뮤지션. 그는 이미 1950년대부터 빼어난 음악가로 인정받았고 1960년대에 이르면 대가 취급을 받는다. 프란시스 레이보다는 훨씬 정교하고 고상한 느낌의 음악을 구사하는 정통 재즈 뮤지션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르그랑의 음악 역시 청중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가는 통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 역시 상투적이다. 그는 1960년대적인 경음악의 상투형을 만든 사람의 하나이다.
프란시스 레이와 미셸 르그랑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르그랑은 프랑스의 음악계에서 ‘대부’의 한 사람으로 취급받지만 레이는 그것보다는 격이 조금 떨어지는 대우를 받는다. 르그랑이 <셸부르의 우산> 같은 고전적인 작품의 음악을 맡아 프랑스적인 감수성을 전세계에 떨친 것에 대해 프랑스 사람 누구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반면 프란시스 레이는 <남과 여>나 <러브 스토리> 등의 잊을 수 없는 테마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내내 <에마뉴엘 부인> <오양의 이야기> 등 에로물에서 조금은 천박한 분위기를 돋우는 경음악을 작곡한 뮤지션으로도 기억된다. 르그랑의 음악은 언제나 짜임새 있고 전형적이지만 프란시스 레이는 편곡이 조금 서툴고 제멋대로이다. 그러나 주제 선율을 듣는 이의 뇌리에 새기는 재주만큼은 레이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르그랑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보드빌 음악과 전통적인 화성악을 재즈적인 바탕 위에서 재해석한 음악이다. 그러나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은 재즈와 록, 경음악의 요소들이 조금은 뒤죽박죽 섞여 있는 국적불명의 음악이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서 함께 음악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영화음악을 엮은 기획 CD가 발매되었다. 두 사람의 대표작들을 섭렵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CD라 소개해본다. 그런데 르그랑쪽이 비교적 원곡에 가까운 편곡을 담고 있는 데 비해 레이쪽은 약간 싸구려로 녹음된 1970년대식 경음악 편곡을 담은 재녹음 음반이다. 오리지널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더라도 프란시스 레이는 그러한 ‘싸구려스러움’을 잘도 견딘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