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청춘>(1968)이 인기몰이를
하는 동안, 기획자였던 김태연은 신필림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를 불렀다. 당시 신필림은 계속되는 흥행 부진과
경기침체로 인해 부도 직전에 놓여 있었다. 전무로 들어간 김태연이 “심우섭이라면 믿을 수 있다”며 신상옥 감독에게 나를 적극 추천한 터였다.
사실 그간 홍성기 감독의 일로 나와는 편치 않은 관계에 있던 신 감독이었지만, 회사를 기사회생시킬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던지 흔쾌히 함께
일할 것에 동조한다. 신 감독이 내민 시나리오는 임하라는 작가가 쓴 것으로, 남자가 식모일을 하며 벌이는 좌충우돌을 다룬 내용이었다. 소재는
특이하고 재미있었으나 내용이 너무 작위적이었다. 나는 신 감독에게 몇 가지 제안을 했다. 사실 제안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조건에 가까웠다.
전체적인 구성은 그대로 가되 대본의 디테일한 내용은 고쳐서 가자는 요구사항이었다. 결정권은 이미 신 감독에게서 나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대본수정 작업에 앞서 나는 명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요리 관련 서적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식모를 다루는 영화라면 당연히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나올 텐데 구체적인 지식이 모자랐다.
마침 명동 뒷골목에는 일본 고서적들을 파는
상점이 즐비했는데 필요한 자료를 대충 모을 수 있었다. 자료가 확보되는 대로 <귀하신 몸>(1966) 등으로 함께 작업한 바
있던 시나리오 작가 안준호를 명동성당 앞 금성여관으로 불러 일주일 만에 수정대본을 완성했다. <남자식모>(1968)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실직중이던 형이 동생의 학비를 벌 목적으로 부잣집 식모로 취직을 하나, 여자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 매순간 실수를 연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수라는 것이 기상천외하다. 부러진 구두굽을 고쳐달라는 주인집 딸에게 남자식모는 고민 끝에 밥풀로 수리를 해줘 결국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거나, 계란 프라이를 해오라고 하자 껍질도 까지 않은 채 통째로 석쇠 위에 구워 결국 병아리로 부화시킨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객석에서는 즐거운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재를 이용해 웃음을 만들어내는 재치와 위트는 지금의 나에겐 없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해냈지?’하며 스스로도 놀라곤 하는 것이다. 남자식모 역은 구봉서가 맡았다. <꿩먹고
알먹고>(1966)에서 같이 일한 뒤로 2년 만의 재결합이었다. 부잣집 도련님 같은 청순한 외모와 눈짓만으로도 위트를 철철 흘리는
구봉서의 기용은 대성공이었다. 서울에서만 20만명 관객을 끌어모았다. 국제극장 앞은 1회부터 매진행렬이 이어졌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구봉서의 부인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자식모>의 흥행 이후 ‘남자 시리즈’가
대유행한다. 내가 찍은 작품만으로도 <남자식모>를 포함해 <남자미용사>(1968),
<남자와 기생>(1969) 등 세 작품이나 된다. ‘남자 시리즈’는 특히 지방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지방업자들이 올라와 ‘남자
시리즈’를 계속 이어서 만들자고 했으나, 나는 세편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남자식모>는 부도위기의 신필림을 구하고 나에게도 넉넉한
삶을 보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69년,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 찾아든다.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7천만원가량을 날리고 말 그대로
알거지가 돼버린 것이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딸아이에게 쥐어 줄 용돈은커녕 살 집조차 담보물로 넘어갔다. 그때, 충무로 대한극장 뒤에 살던
배우 김희갑이 자신이 살던 방 4칸을 선뜻 내어주며 나를 이끌었다. 눈물이 났다. 어려운 시기에 손 내밀던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한번은 여배우 도금봉이 당시 내 처지를 몰랐는지 마작을 하자며 찾아왔다. 처지를 설명하자 그녀는 2만원가량의 빳빳한 십원짜리
지폐뭉치를 쥐어주고 딸아이의 용돈이라도 주라며 돌아섰다. 2만원이 2천만원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김희갑이 죽고나자 나는 그의
묘비를 손수 세우고 거기에다 시를 새겨넣었다. 그렇게 하고나니 어느 정도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을 던 기분이었다.
구술 심우섭|영화감독 1927년생·<남자식모> <즐거운 청춘> <팔도며느리>
등 다수 연출
정리 심지현|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