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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1]
2003-05-09

당신의 장편이 보고 싶다

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씨네21>은 창간 8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영화계의 지평을 일구고, 읽어가는 대표적인 감독과 학자, 평론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국의 단편영화감독 중 그의 장편을 반드시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유와 함께 큰 목소리의 ‘지지’도 부탁했다. 때론, 또다른 이유의 완곡한 거절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 전후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의 길을 가는 8명의 감독, 그들에 대한 강경한 믿음으로 가득 찬 지지의 글 8편을 싣는다. - 편집자주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추천자 : 봉준호 감독

발랄한 아이디어, 놀라운 편집 감각

<기념촬영>의 정윤철 감독

단편영화를 보다가 눈물이 후두두 떨어진 건 처음이었다. 다시 개통한 성수대교 위에 모여선 소녀들. 한 아이는 어엿한 여대생이 되었고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교복을 입은 여고생의 모습이다. 그들은 기념사진을 찰칵 찍는다. 화면은 정지되고 성수대교의 재개통을 알리는 뉴스앵커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음악이 흐른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교복 입은 아이들은 모두 유령들이고, 여대생이 된 아이는 살아남은 아이다. 정윤철의 단편 <기념촬영>은 가슴 깊은 곳을 뒤흔드는 영화다.

내가 정윤철을 처음 만난 건 엉뚱하게도 1991년 방위병 생활 때였다. 연대본부 인사과 행정병이었던 나는 새로온 신병들의 인사카드를 정리하다가 연극영화과 출신 한명이 부대로 왔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당시 나는 방위 생활과 영화독학을 병행하던 시절이었다. 퇴근하면 빡빡머리를 한 채 시네마테크에 가서 영화도 보고, 부대에서도 몰래 영화이론서를 뒤적거리곤 하던 나는 모처럼 부대에 ‘정통파(?) 영화전공자’가 나타나자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연대본부 뒤편으로 정윤철을 불러낸 나는 “16mm 단편을 하나 찍으려면 돈이 얼마 정도 드냐?” “카메라는 어디서 빌리는 거냐?” 등등 지금 생각하면 단순유치한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아직 신병이라 군기가 바짝 든 정윤철은 거의 차렷자세로 “넷! 16 mm 필름은 한자당 가격이…” 등등 기합이 들어간 대답을 계속하고…. 거의 코미디의 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제대 뒤 나는 영화서클의 선후배들과 같이 16mm 단편영화를 처음으로 연출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어느 대학의 총학생회 홍보용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그 비디오는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놀라운 편집감각으로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것이었다. 놀란 나는 “이거 만든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다. “정윤철이란 친구가 연출, 촬영, 편집 다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분이 묘하고 웬일인지 반가웠다.

그리고 또 몇년이 흐른 뒤, 지금은 없어진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정윤철의 <기념촬영>을 처음 만나게 된다. 물 흐르듯 떠다니는 카메라가 평화로운 등굣길의 여고생들을 따라간다. 햇살 아래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이윽고 버스 정류장, 한 아이는 스케치북을 안 가져왔다는 걸 깨닫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다른 한 아이는 버스에 탈까 말까 망설이다가….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는 성수대교를 향해 무심하게 달려간다. 그날은 바로 성수대교가 붕괴한 날이다. 한 아이는 살고 한 아이는 죽는다. 한 아이는 여대생이 되고 한 아이는 유령이 되어 영원히 교복을 입는다. 삶과 죽음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엇갈려버리는 그 순간, 짧고도 영원한 순간을 보여주던 카메라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호흡하듯 흔들리는 카메라가 햇살 아래 마주선 둘의 모습을 180도 반대편에서 번갈아 보여주며 섬광 같은 커팅이 몇 차례 반복된다. 정윤철이 직접 들고찍었으며, 특유의 감각으로 편집한 그 장면은 순간의 공기를 고스란히 포착했고, 선연한 화면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더더욱 비극적이었다.

어쨌든 죽은 아이들은 금방 잊혀진다. 실제 성수대교 붕괴 당시 목숨을 잃었던 무학여고 학생들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세상을 떠난 소녀들만 분하고 억울할 뿐, 이미 사람들은 그 아이들을 기억해줄 여유가 없다. 정윤철의 <기념촬영>은 그토록 여유없는 우리의 가슴에 조용한 직격탄을 날리는 영화다. 만일 당신이 이 영화를 봤다면, 차를 타고 무심하게 성수대교 위를 지날 때, 문득 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다리 위를 걸어가는 흰 교복의 여학생이 한순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 순간순간이 세상을 떠난 소녀들에겐 일말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요즘 정윤철은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한 자폐증 청년이 마라톤을 하게 되는 이야기라는데, 실제 인물에 기초한 스토리란다. 커다란 스크린 위에 펼쳐질 정윤철의 화면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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