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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6]
2003-05-09

추천자 : 서동진 문화평론가

정직한 모더니스트에 건네는 기대

<나들이>의 김선경 감독

지난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단편영화가 걸어왔거나 걸어갈 몇 가지 행보를 짐작해보면 어떨까. 먼저 하나는 단편영화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란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이 물음은 해묵은 것이지만 유효하다. 또 미디어가 만든 스펙터클이 곧 세상의 이치가 되어버린 세상이기에 이런 물음은 고쳐 묻고 다시 묻는 물음이 되어야 한다. 영화가 사실상 애니메이션이 되고 CF가 되고 멀티미디어 콘텐츠가 되어버린 시대에 영화에 대한 물음은 다시 기획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단편영화가 아예 잡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잡담이란 나쁜 것이 아니다. 영화란 이미 자기 삶에 대한 글쓰기의 일종이 되어버렸고 영화는 고백과 술회와 말건네기의 형식이 된 지 오래이다. 영화가 젊은 날의 앨범이 되어 즐거운 대화가 오가는 동네가 된다면 뭐가 그리 나쁘단 말인가. 세 번째로 단편영화가 포트폴리오가 되는 것이다. 이 역시 의심의 눈길로 봐서는 안 된다. 입봉을 위한 연습으로 단편을 찍고 그를 통해 자신의 숙련과 감성을 제시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또 미더운 일이다. 물론 여기에 우리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가할 수 있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내게 <씨네21>이 내준 아주 단순한 숙제, “장편으로 입봉했으면 잘해낼 단편영화 감독은 누구냐”란 물음에 선뜻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그 물음은 취향과 입장의 문제이기에 앞서 영화 자본과 화혼할 수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물음을 조금은 비틀어 읽으면서 내가 택한 감독은 김선경이다. 내가 본 그의 작품은 지난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본 <나들이>뿐이다. 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드물게 35mm 작품이었고 또 충분히 과숙한 기본기를 보였기 때문에 그 작품을 일찌감치 상받을 만한 작품으로 점찍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김선경의 <나들이>는 만삭의 딸과 함께 살 집을 보러 다니는 모녀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아서는 만삭인 딸의 임신이 원치 않던 임신인지 아니면 남편이 없는 홀몸의 임신인지 알 수 없다. 남편은 보이지 않고 또 만삭인데 따로 집을 얻어 살아야 할 형편 때문에 모녀가 집을 얻으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수상해 보일 뿐이다. 두 모녀는 서먹하고 애매한 사이를 둔 채 길을 걷고 국밥을 먹고 집을 살핀다. 그게 전부인 이 짧은 영화에 그러나 김선경은 아주 훌륭한 제목을 붙여주었다. <나들이>가 그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세대의 문화적 기류와 소통하는 영화는 아니다. 단편영화 감독들 사이에 하나의 유행어가 된 일상에 관한 영화에 끼워넣자면 그 속에 낄 수야 있겠지만 그 영화들이 취하는 시각적 상투어구들에 비하면 이 작품은 훨씬 정직하고 순수했다. 일상의 영화를 찍겠다는 미명하에 뜬금없이 버석대는 화면을 고통스럽게 반복하는 영화들이 범하는 잘못을 적어도 이 영화는 저지르지 않는다.

요컨대 이 영화는 감응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능력을 알고 있고, 화면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정서적인 촉발에 대해 드물게 민감하다. 그렇게 보자면 김선경은 아주 정통파 모더니스트 감독이다. 그녀는 반복강박적인 이야기의 쾌락에 열중한 영화와 이야기 안으로 축소될 수 없는 특출한 감동의 능력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고유한 능력 사이에서 단연코 후자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흉내만 낼 줄 알았지 그것을 끄집어내기 위한 섬세한 눈길을 갖지 못한 많은 에피고넨들에 견주면, 그는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터득한 카메라의 눈길을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 내부의 눈길과 포개는 겸허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충분히 세상의 알레고리를 저며내는 능력을 선보이고 있다. 내겐 이 점만으로 그가 장편을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는 단편이 잘할 수 있는 것보다 장편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할 줄 알거나 아니면 예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능력을 지닌 장편 감독들이 만들어놓은 영화들에 슬슬 짜증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 영화들은 점점 심리분석가의 시늉을 취하거나 아니면 냉소적인 몰래카메라의 눈길을 건넨다. 아마 김선경은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낭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층계급의 모녀에게 보낸 그의 눈길이 장편영화로 갔을 때 무엇이 나올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 한번 장편을 맡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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