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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강유원(철학박사) 2003-05-09

가톨릭 교도라 하면 그래 하면서 놀라기부터 한다. 그런 고결한 신앙을 가진 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도 더러 세례명을 묻는 이가 있기는 하다. 야고보다, 야곱, 제이콥이다. 냉담자요, 배신자인 마당에 이제 와서 한때의 성당 편력을 들먹여서 무엇하겠으며 신앙이 어떠니 경건함이 저떠니 해봐야 뭐하겠는가마는 어쨌든 신앙이라는 게 거추장스러운 짐일 때가 있다. 그 신앙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윤리적 덕목마저 지키지 못할 때가 그중 하나다. 가령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거 솔직히 지키기 힘들다. 아니 지키고 싶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미운 놈은 미워해야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화를 뿜어내야만 한다. 이런 기본도 안 돼 있으니 성당에 발 끊은 건 백번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야곱 하면 떠오르는 게 영화 <야곱의 사다리>와 <빵장수 야곱>이라는 책이다. <성자가 된 청소부> 따위와 함께 한국에서 꽤나 팔렸던 책이다. 까마득히 잊혀진 줄 알았는데 이 책이 돌아왔다. 복잡한 세상을 사는 소박한 지혜라는 슬로건을 달고 10년도 더 지나서. 희한한 현상이다. 배신자 야곱은 신앙을 버린 지 오랜데 빵장수 야곱은 빵 팔러 다시 온 것이다.

세례명이 들어가 있어서 기대 반 예측된 실망 반으로 열심히 읽었으나, 읽고 나서 욕을 한 무더기 했던 책이다. 모든 게 내 탓이고, 내 맘에 달렸다, 빵장수라고 진리- 이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문제겠지만- 를 깨닫지 못할 거 없다, 딱 잘라 말해서 착하게 살자는 내용이다. 돌아오면서 매달고 온 슬로건처럼 세상은 복잡하니 이리 머리 굴리고 저리 몸써봐야 내 머리 피곤하고 내 몸 다치기 십상이다, 그러니 대충대충 포기하고 사는 게 지혜라는 말이겠다. 참 소박도 하다.

언뜻 보기에는 구구절절 옳다. 그런데 한번만 뒤집어보면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세상이 복잡하면 당연히 생각도 복잡하게 해야 하고 뼈대를 확 추려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맞받아치든지 최소한 덜 당하고라도 살 수 있는 거 아닌가, 소박하게 내 탓입네, 내 맘에 달렸네 하면서 자기최면 걸다보면 화병만 도지는 거 아닌가, 결국 이거 완전히 패배주의적 신비주의적 발상 아닌가, 미운 놈은 미워해야지 내버려두자고? 빵장수 야곱은 마음이 그렇게도 하해와 같은가.

도대체 빵장수 야곱은 느닷없이 왜 돌아왔을까? 야곱이 돌아온 앞뒤를 여기저기 둘러보니 어디선가 띠익 나타난 틱낫한이라는 작자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해부터 이 양반 책이 서점에 깔리고, 화를 내면 안 된다느니, 그걸 다스려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개나 소나 입에 올려대는 무슨 심리 치료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냥 거기서 그쳤으면 씨익 지나가고 말았을 텐데 그게 아니었다. 이 양반 반전시위가 한창일 때 한국에 왔었다. 자기와 헤어스타일이 똑같은 기자 양반과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 주고받으며 인터뷰도 했었다. 경호원들이 주변에 진을 치고, 거리에서 몇 걸음 워킹하고, 들으라는 놈들은 콧방귀도 안 뀌는 무슨 메시지 여기저기 보내고, 하여튼 이런저런 이벤트와 세레머니 몇건하고 갔다. 부산스럽게 보낸 일정을 정리해보니 결국 열댓권이나 출간된 자기 책 판촉활동하고 간 거 같다. 영화 개봉할 때쯤이면 한국에 더러 오는 배우들처럼 말이다.

그는 뭘 남기고 갔나? 그의 책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있기나 한가? 그의 책은 사실 전달을 넘어서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그의 메시지는 과연 한국과 세계의 전쟁광들을 얼마나 거꾸러뜨렸나? 그의 행동은 거대한 콘크리트 벽처럼 딴딴한 세계를 얼마나 무너뜨렸나? 아니 그런 건 다 제쳐두고 도대체 저 사람은 어디서 돈 나서 저러고 다니는 걸까? 혹시 누가 대주는 거라면 그 돈은 무슨 뜻으로 대주는 걸까? 무수한 의문만 떠돌 뿐 우리가 따라 할 만한, 그렇게 따라 해서 세상을 바꿀 만한 건 하나도 없는 듯하다. 굳이 들자면 밥 먹을 때 종치는 거나 따라 할 수 있을까. 근데 종은 무슨 종. 정신사납게시리. 어떤 연구에 따르면 밥 먹을 때 말하면 소화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밥 먹을 때 떠들면 복달아난다는 게 헛소리가 아니라는 거다.

야곱과 틱낫한, 심상찮은 2인조다. 배신자 야곱의 눈에는 빵장수 야곱이나 종치는 틱낫한이나 모두 한가한 사람들, 유한계급이다. 스트레스 증진요소들일 뿐이다.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