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특히 롤 플레잉 게임에서 운명이란 말은 꽤 자주 들먹거려진다. 운명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운명의 전사로 성장하고, 운명의 동료들과 함께 운명의 적과 맞서 세계를 구할 운명을 수행한다.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2>처럼 아들이나 딸이 부모의 대를 이어 또다시 운명의 전사로 세계를 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운명의 동료와 운명의 적이 새롭게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다.
운명이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리스 비극의 많은 주인공들이 이 질문에 답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현실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게임에서만은 이 질문의 답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다.
일본 롤 플레잉 게임은 흔히 단선 진행 롤 플레잉 게임이라고 불린다. 많은 경우 미리 정해진 경로가 있어서 그대로 따르며 플레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 A에 도착하면 다리가 끊어져 있다. 고쳐서 대령해야 마을 B로 갈 수 있다. 이번에는 동네 꼬마가 버섯을 따러갔다가 길을 잃었다. 구해주면 꼬마의 할머니가 마을 C로 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알려준다.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건은 다음 이야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길은 없다. 정 그러기 싫으면 게임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가라는 곳으로 가서 하라는 대로만 해야 한다. 그 어떤 그리스 비극보다도 더 절대적 운명이다.
하지만 잘 만든 게임이라면 플레이를 하며 강요받는 불쾌감은 들지 않는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가야 할 곳은 촌장 집이지만 우선 적당히 노닥거려본다. 우물가 아가씨한테도 말을 걸어보고, 주막에서 한잔 걸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물가로 가면 얼굴을 비춰볼 수도 있다. 내가 거기 가지 않았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의 물거울은 아름다운 소년 나르시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못지않은 착각을 일으킨다. 게이머는 스스로가 게임을 지배한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생각해보니 사람들만 해도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살이에 지친 노인이 마지막으로 고향에 가보고 싶어한다. 시골 청년의 순진한 가슴이 짝사랑에 멍들어간다. 병든 엄마를 위해 약초를 캐러 간 소녀가 괴한에게 납치되었다. 가만 있을 수 없다. 강요받아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온다. 노인의 주름진 손이 내 손을 꼭 쥔다. 청년의 눈에 감사의 눈물이 맺힌다. 엄마와 딸이 다시 만나 포옹한다.
얼마든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지만 내 의지로 이 길을 선택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거기는 가지 말고 저쪽으로 가자”는 대사가 나온다는 사실은 무의식 수준에서 삭제되었다. 내 운명은 나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이는 착각이라기보다는 자기 기만이다. 내가 물가에 가지 않았다면 수면에 얼굴이 비쳐지지 않았을 거라고, 내가 몬스터에게 달려가지 않았으면 마을 사람들은 죽었을 거라고만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었으면 게임 자체가 한 걸음도 진행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내 손을 거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 게 존재한다는 믿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다. 게임이 던지는 유혹에 기꺼이 몸을 맡기고, 게임이 던져주는 미끼를 받아먹는다. 내가 자기 운명의 개척자인 양 자청해서 속아넘어가는 건 그래서다. 주체성의 환상은 은밀한 공모로 놓치는 진실보다 훨씬 즐겁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