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나는 시장(市場)이 마음에 안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모든 상품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갖는 최종심급의 법정이다. 하지만 이 법정은 공정하지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의리라는 것도 없으며 어른에 대한 예의조차 없다.
시장이 공정한 법정이라면, 촬영만 11달 걸리고 후반작업에 5달 동안 공들인 <화산고>가, 제작발표회 한 지 세달 만에 극장에 걸린 <두사부일체>에 그렇게 형편없이 깨지지는 않았어야 한다. 고등학교와 깡패라는 성분은 같았는데, <화산고>의 죄라면 구태의연한 관습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작품의 완성도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다는 것일까. 또, 시장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면, 2002년의 최고 흥행작은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오아시스>가 됐어야 했다. 또한 이 시장이 한 가닥 의리라도 있다면, <친구> 때 열광적으로 헹가래치다가 <챔피언> 앞에서 뿔뿔이 흩어져 감독으로 하여금 졸지에 맨바닥에 떨어져 허리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시장은 위아래도 없다. 어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면, 70년대 이전에 데뷔한 감독 가운데 생존자가 임권택 감독 한명뿐인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리오. 자본주의 사회인 한, 세상에서 시장은 주류의 제도다. ‘시장이 싫으면 작가가 떠나라’고 하던가.
그래서 대개의 제작자나 감독들도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수익을 거둔다’는 경제법칙을 준수하면서 주류 소비자 집단에 아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명실공히 ‘상업영화의 달인’도 여럿 출현했다. 이들 ‘선수’들은 절대 ‘오버’하지 않는다. 장르의 관습에서도, 다소 단순하고 유치한 내러티브에서도, 제작비에서도. 유행 장르의 틀을 빌려와선,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빤한 트릭들을 재활용하면서,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이야기를 척척 조립해내는데, 어김없이 박스오피스의 환대가 기다린다.
이런 형편에서 그래도 나름대로 철학과 고집을 꺾지 않고 싶어하는 작가감독들이 할 수 있는 얘기는 이런 것이다. “흥행은 귀신도 몰라. 어차피 모르는 것이라면 감독은 내 걸 찍겠다고 밀고 나가야지.” 이명세 감독은 <화산고>를 찍은 김태균 감독에게 선배로서 이런 충고를 했다.
하지만 이것도 다, 자기 색깔대로 영화 찍겠다고 밀고 나가는 감독을 봐주는 제작자가 있을 때의 얘기다. 감독의 모험과 도전을 후원해주는 제작자가 충무로에 더이상 없다면 이명세 감독도 빨리 직업을 바꾸거나 아니면 프로듀서들을 찾아다니며 ‘맞춤한 아이템’ 하나 없는지 수소문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 개봉관에서 혼자 <화산고>를 보았는데, 이처럼 감각적이고 세련되게 영화화면에 옮겨진 만화적 판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짐작건대, 김태균 감독으로서는 이 작품에서 해보고 싶은 만큼 실컷 해서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작품을 찍은 감독보다도 이 작품을 찍게 해준 제작자에 대한 존경의 염이 솟았다. 이 제작자는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아마도) 최대한 재량권을 주고 50억원의 제작비를 대면서 2년 동안 기다려주었다.
<무사>는 한술 더 뜬다.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었던 이 프로젝트는 온갖 진기록들 때문에 매스컴의 사랑을 받았다. 순제작비 55억원에, 보통영화들의 7배쯤 되는 35만자의 필름 사용, 호주에서 3달 이상 사운드 작업, 2시간30분이 넘는 러닝타임. 감독이 중국 오지의 사막에서 한여름의 땡볕과 한겨울의 혹한과 싸우며 스탭들을 이끌고 지옥과 연옥을 오갔다 하더라도 다 자기 작품에 대한 열망의 대가일 뿐이다. <무사> 역시 ‘징한’ 감독보다 ‘통 큰’ 제작자를 평가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화산고>와 <무사>의 제작자 차승재씨가 최근에 내놓은 두편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와 <살인의 추억>에 대한 일부 일간지와 영화잡지의 태도에서 더러, ‘이런 제작자는 살려야 한다’는 캠페인의 정서가 읽힌다. 안타깝게도 <지구를 지켜라!>는 그 발칙한 상상력의 즐거움을 관객이 거절하거나 포기해버렸지만, <지구를 지켜라!>와 <살인의 추억>은 두편 모두 올해 한국영화의 숨통을 틔워주는 문제작들이다. <살인의 추억>은 반드시 영화관에서 보아야 할 영화다.
스크린쿼터도 살리고, 좋은 영화, 좋은 감독도 살려야겠지만, 이 모든 것이 좋은 제작자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조선희/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