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10년 가까이 된다. 아버진 평생 회사원이셨다. 소심하고 무기력한 회사원…. 하지만 안락한 회사원. 그 시절 최루탄 뒤집어쓰고 집에 들어오면 프로야구를 보시다 늦게 들어오는 나를 혼내시는 아버질 보며 그 당시 난 비웃었다…. ‘젠장! 평생 회사원이나 해라’ 하면서 혼자 몰래 아버지 담배 를 훔쳐 피우며 내 방에서 저주의 말을 뇌까리곤 했다. 그는 내가 보기에 친구도 없었다. 어린 시절 친구에 대해 아님 하다못해 대학 시절 친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오로지 술 마시면 만화책(박수동의 <번데기 야구단> 같은 책)을 사들고 들어와서는 우리 3남매를 약올리면서 혼자만 보시다가 잠들어버리곤 하셨다. TV 속의 아버지들을 보면 친구들이랑 술 마시며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동네 사람들하고 잘도 어울리던데… 참 내 아버진 전화오는 것을 못 봤으니 필시 어른왕따일 거야 하며 생각해보곤 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까닭은 비가 마치 여름 장마처럼 우줄우줄 내리는 봄날, 내 방에서 <스탠 바이 미>를 다시 봤기 때문이다. <스탠 바이 미>(Stand By Me, 1986), 롭 라이너 감독. 지방 소도시의 4명의 소년들(그 리버 피닉스의 소년 시절이 나온다)… 어느 날 그들은 기찻길을 따라 시체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한다. 문학소년 고디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그들은 노숙도 한다(그 이야기란 어떤 왕따소년이 먹기대회에 나가 엄청 먹고 엄청 토하는데 그를 비웃던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토한다는, 통쾌하지만 어쩐지 우울한 이야기). 가는 도중 윗연배의 동네 건달들에게 위협당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가장 약골이던 문학소년 고디가 권총으로 건달들에게 겁없이 협박까지 하는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자기 또래의 시체를 찾아낸다. 처참한 시체를 보고 그들은 말없이 익명의 이름으로 신고한다. 집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 그들은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어른이 된 약골 문학소년 고디가 12살 시절 그 친구들을 회상하며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쓴다. ‘그 시절 그런 친구들을 난 평생 만나지 못했다’라는 말로 이 영화는 끝난다. 뚱보와 안경 쓴 폭주친구 그리고 어른스러운 리버 피닉스와 주인공 소년…. 예전엔 리버 피닉스와 섬약한 주인공 소년에 푹 빠져 봤는데 이제 나이들어 보니 어느덧 나는 뚱보소년과 폭주소년에 마음이 꽂혀 가슴 아파하며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저런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면서 말이다. 어른이 되면 절대로 못 만날 것 같은 친구들. 그들과 말없이 지내는 나를 찾고 싶은 마음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뚱보친구와 폭주소년 같은 친구들은 한명도 안 왔지만 회사 동료들은 우글우글이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비슷하게 늙어가는 회사 동료들이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친구는 이렇게 가까이 있는 직장동료인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서 동전을 주워서 기뻐하는 뚱보친구와 해병대 흉내내며 폭주하는 말썽꾸러기 친구들을 찾고 싶었다. 아니 나도 동료에게서 이런 친구를 찾고 싶다. 아니면 내가 그들에게 동전을 주워서 캬하하 웃는 뚱보친구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아버진 그런 친구를 동료 중에서 찾았을까? 아직도 난 궁금하다. 아쉽게도 전화해서라도 물어보고 싶지만 그곳은 전화가 안 된다. 젠장 맞을 봄비 때문에 난 어울리지 않게 센티멘털해져 있다. 센티멘털이라, 으흠, 어울리지 않는다. 이불 덮고 누워서 꼼지락거리며 만화 의 친구들에게나 푹 빠져야지, 나에게 제격이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이 만화책 좋아했을 텐데. 약올리면서 혼자만 봐야지.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sicksadworld@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