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격언에 따르면, “악마는 노력을 발견했고 악마의 할머니는 기다림을 발견했다”고 했다. 모든 기다림의 시간이 그렇게 괴롭고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이건 기다림의 시간이란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의 시간인가를 지적할 때 쓰이곤 하는 문구이다. 의 주인공 클레오는 자신이야말로 그처럼 고통스런 경험으로서의 기다림의 시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사로부터의 진단 결과다. 클레오의 입장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가 도무지 궁금한 나머지 점쟁이에게 물어본 결과 죽음이 눈앞에 와 있음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저 단순한 진단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당면한 죽음에 대한 최종 확인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클레오>는 제목에 쓰인 대로 5시부터 7시까지(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6시30분까지이다)의 그 ‘죽음의 시간’ 속에서 허우적대는 클레오의 방황의 여정을 따라간다.
자신의 신체에 부정적인 측면에서 무언가 큰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한 클레오(코린느 마르샹)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점쟁이를 찾아간다. 그리고 점쟁이가 본 카드점에서 중병에 걸려 곧 죽을 것이라는 나쁜 징조가 모습을 드러내자 몹시 상심하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게 된 이 아름다운 가수가 5시부터 6시30분까지 어떤 과정을 밟게 되는지를, 프레드 진네만의 걸작 웨스턴 <하이 눈>(1952)이 그랬던 것과 유사하게 실제 시간의 흐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듯한 호흡으로 따라간다. 자신의 임박한 절망적인 운명을 알고만 클레오가 이후 카페에서 비서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애인과 작곡가의 방문을 받고 또 친구를 찾아가는 등의 90여분간에 걸친 행보가 정말이지 90여분 동안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것이다.
클레오의 발걸음을 따라가던 우리는 중반부쯤 그녀가 영화관에 들어감에 따라 그녀가 보는 짧은 영화 한편을 보게 된다. 아주 흥미롭게도 장 뤽 고다르와 과거 그녀의 뮤즈였던 안나 카리나, 그리고 뒤에 고다르의 <알파빌>(1965)에서 주연을 맡을 에디 콩스탕틴이 배우로 출연하는 그 짧은 영화는, 자신이 쓴 검은색 선글라스가 자기 앞의 시야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한 남자(고다르)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버스터 키튼 풍의 무성 코미디영화다.
이건 심적 고통을 겪고 있는 클레오에게나 또 그녀의 행보를 따라가는 우리에게나 잠시나마 유쾌하게 쉴 틈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깊이 따져보면 영화의 전체 움직임과 반향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따져보지 못했던 영화 속의 남자는 바로 클레오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클레오 역시 영화 속의 남자처럼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실제와 유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리의 이곳저곳을 따라가는 <…클레오>의 여정은 시공간에 대한 탐구이면서 클레오라는 인물의 내면에 대한 탐구이기도 한 것이다. 처음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클레오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인물, 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정의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영화의 중반을 지나면 그녀는 중요한 계기를 거치면서 자신에게도 ‘시선’이 있음을 알아간다(그래서 중반 이후에는 그녀의 시선에 포착된 시점숏들이 특히 많이 나온다). 클레오의 발걸음을 따라가면서 영화는 그녀가 남들의 시선을 받기만 했던 객체에서 스스로 보기도 하는 주체로의 미묘한 변화를 조용히 따라간다.
<…클레오>는 분명 주인공 클레오의 내면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이야기해도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리얼리티 너머의 영역으로 뛰어들어가 그렇게 하는 영화는 아니다. 반대로 영화는 철저히 리얼리티를 고수하면서도 그 안에 인물의 내면의 미묘한 변화를 시적인 터치로 그려낸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이 아름다우면서도 깊이와 격조를 갖춘 영화는 아녜스 바르다라는 여성 영화감독을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90년대 중후반쯤에 바르다는 주인공 클레오 역에 마돈나를 기용하고 시대 상황에 맞춰 클레오의 고민을 암에서 AIDS로 바꾼 미국산 리메이크를 만들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리지널을 본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흥미를 불러일으킬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든 실행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Cleo de 5 a 7, 1961년감독 아녜스 바르다출연 코린느 마르샹, 앙투안 부르세이예화면포맷 1.66:1 와이드스크린오디오 돌비디지털 모노자막 한국어, 영어출시사 알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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