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e & Tortoise>, ‘토끼와 거북이’라는 이름의 보드 게임이 있다. 토끼 1번부터 토끼 6번까지 토끼 역할을 하나씩 나누어 맡는다. 이 게임은 레이싱 게임이다. 결승점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승자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 제일 중요한 거라면 역시 주사위 운이다. 한개, 혹은 여러 개의 주사위를 굴려 나온 눈만큼 전진한다. 아무리 기가 막힌 작전을 짰더라도 마음먹은 대로 주사위 눈이 나와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놀랍게도 얼마나 나아갈지를 자기가 알아서 정한다. 그렇다면 무작정 내달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야 게임이 성립하지 않는다.
토끼들이 달리려면 당근이 필요하다. 1칸을 가고 싶다면 1개만 먹으면 되지만 10칸을 가려면 55개, 결승점까지 64칸을 단번에 내달리려면 무려 2080개의 당근을 먹어야 한다. 처음에 주어지는 당근은 65개다. 호탕하게 한번에 다 해치우더라도 11칸밖에 가지 못한다. 더 가려면 당근을 얻어야 한다. 당근을 얻기 위해서는 잠깐 자기가 토끼라는 것을 잊어야 한다. 양배추밭이나 당근밭에서 한턴 쉬거나 거북이가 되어 뒤로 가면 당근을 받는다.
하지만 이 게임의 진정한 거북이성은 따로 있다. 당근 획득 시스템은 1등보다는 4등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다. 숫자칸과 자신의 등수를 끼워맞추면 당근을 받는데 1등은 열개지만 6등은 60개를 받는다. 양배추밭에서도 자신의 현재 등수에 10을 곱한 만큼 당근을 받는다. 1등은 큰 수확이 없지만 등수가 뒤쪽일수록 재미보는 곳이 양배추밭이다. 뿐만 아니라 결승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배추밭에서 세번 쉬었어야 하고, 당근도 일정 갯수 이하로 남아 있어야 한다. 무조건 빨리 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느긋하게 거북이짓을 하다가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다는 게 이 게임의 특징이다.
얼마나 움직일 것인지 알아서 정하도록 하는 놀라운 발상은, 얼핏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욕망을 조절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줄 뿐이다. 만일 30분이면 끝나는 보드 게임 한판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레이싱 게임에서라면 어떨까? 남보다 빨리 가겠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남은 당근을 다 써버리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간신히 알아차렸을 때면 이미 늦었다. 다시 시작할 길은 없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