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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와 여전사들
2003-04-23

이번 전쟁으로 졸지에 스타(?)로 떠오른 이라크의 공보장관이 언젠가 미·영 동맹군에 ‘자살공격’을 가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실제로 한 이라크군 장교의 자살공격으로 미군 병사 네명이 숨진 데 이어 며칠 뒤에는 두명의 여성 전사가 자살공격으로 다시 세명의 미군 병사를 살해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언론은 이것이 마치 임신부를 인질로 잡은 테러인 양 보도했으나, 나중에 그 “임신부”라는 여인도 이른바 ‘순교’를 자원한 전사로 밝혀졌다. 한손에 코란을 다른 손엔 소총을 들고 결연하게 순교를 맹세하는 장면이 아랍쪽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내게 이 보도는 충격이었다. 여성이 자살공격을 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보다 ‘임신부’라는 말이 매우 끔찍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뱃속에 든 생명을 보호하는 게 어미의 본능일 터,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야 자유의지라 해도, 자신의 결정에 아기의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 여인이 정말로 임신부였는지, 아니면 미군 병사들을 유인하기 위해 임신부를 연기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궁금하다. 어느 쪽이었을까?

이 자살특공대에 서구의 언론들은 ‘가미카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살공격은 전세가 불리한 쪽에서 사용하는 전술로, 그 자체가 그들의 좌절과 절망을 반영한다. 여기서 정치의식은 극단화하여 종교와 하나가 된다. 자살공격은 정상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어떤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종교의 힘을 빈다. 그 가망없는 몸짓으로 기적을 창조하기를 바라는 것도 실은 종교적 심성에 가깝다. 이 점에 관한 한 사실 가미카제와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서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신도를 원용한 가미카제와 이슬람을 원용한 자살특공대 사이에는 또한 차이가 있다. 가령 일본은 고대 그리스처럼 다신교의 문화를 갖고 있고, 반면에 이슬람은 유대의 헤브라이즘처럼 강력한 일신교 문화를 갖고 있다. 일본에는 고대 그리스처럼 선악의 피안에 서 있는 ‘신화’가 있다면, 이슬람에는 고도로 발달한 ‘신학’이 있다. 일본의 문화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면, 이슬람에서 절대자와 유한 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이 문화적 차이가 자살공격에 각각 다른 색깔을 부여한다.

실러의 말대로 “신들이 더 인간적이었을 때, 그때 인간은 더 신적이었다.” 신들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에서는 인간이 제 존재를 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삶의 최고 목표가 된다. 신화 속의 신들은 선악의 도덕에 구애받지 않기에, 신이 되려는 인간들은 ‘선’이 아니라 ‘우수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 이렇게 인간을 초극하여 신이 되려는 자들을 규제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이 아니라 초인의 ‘미학’이다. 가미카제가 주는 감동은 윤리적 감동이 아니라 예술적 감동. 그것은 ‘신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라는 종교적 코드가 아니라, ‘인간의 자아 초극’이라는 존재미학에서 흘러나온다.

이슬람 자살특공대의 경우는 다르다. 가미카제가 ‘영웅’이라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순교자’다. 가미카제가 자결을 통해 제 존재를 ‘완성’하려 했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헌신을 통해 제 존재를 ‘포기’하려 한다. 가미카제가 죽음이라는 인간적 한계를 넘는 ‘초인’의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린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한갓 신의 뜻을 실현하는 ‘소도구’로 자신을 끌어내린다. 가미카제가 극단적인 ‘우월함’의 미학을 실천한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극단성적인 ‘겸손’의 도덕을 지향한다. 가미카제가 ‘불멸의 명성’을 얻어 세속에서 영원성에 도달한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대가로 신으로부터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과 낙원을 약속받는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미학이나 윤리를 전쟁의 원리로 도용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는 한 가지다. 과연 자살공격은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그것의 가치는 그것을 팔아먹는 사람들이 잘 아는 법. 가령 사담 후세인은 텔레비전에 나와 “순교를 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렇게 외치던 후세인 자신을 보자. 순교할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그 천금 같은 기회를 어디 활용하던가? 그의 천국은 이미 지상에 있기에 따로 천국에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순교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천국을 팔아먹던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엘리야처럼 병거를 타고 산채로 승천을 한 것일까? 진중권/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