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소울 캘리버> 그리고 <릿지 레이서>. 남코는 일본 게임산업의 기술 수준을 대변하는 엘리트 회사다. 그런 남코에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니 어색하다. <유메리아>의 어딘지 어설픈 3D 캐릭터들은 지금까지 남코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같은 게임이라면 캐릭터가 예쁘거나 멋지거나 섹시해서 손해볼 일은 없다. 남코 걸들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었다.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첫 번째 남코 게임은 아마도 80년대 초반에 나온 <드루아가의 탑>일 것이다. 드루아가 탑에 갇혀서 연인 길이 구해주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카이는 전형적인 수동적 여성이고 두 연인을 돌봐주는 여신 이시타는 어머니 같은 여성이다. 어느 쪽이건 남자의 판타지다. 반면 <원더 모모>의 모모는 비슷한 시기에 나왔지만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는 직접 싸우는 여성이다. 당시 대유행이던 마법 소녀물의 영향인지 헬멧을 쓰고 원더 모모로 변신해 싸웠다. 그렇지만 본격 전투 여성의 원조는 역시 <왈큐레의 전설>의 왈큐레다. 같은 전쟁의 여신이면서도 이름값을 못한 이시타와는 대조적으로 왈큐레는 방패와 칼을 들고 직접 싸움에 나섰다. 제니퍼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히로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스플래터 하우스>는 영화 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스하키 골키퍼 마스크를 쓰는 건 악당이 아니라 주인공 릭이다. 납치된 여자친구 제니퍼를 구하기 위해 지옥으로 뛰어든다. 드디어 마지막 방에서 제니퍼를 만났지만, 그녀 자신이 괴물로 변해버린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괴물로 변한 그녀를 직접 해치울 수밖에 없다. 그토록 기다리던 연인을 만난 순간 괴물로 변해버린 제니퍼나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릭 중 어느 쪽이 더 괴로웠는지는 알 수 없다.
90년대 들어 남코는 대전 액션 게임에 주력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남코 걸들이 데뷔했다. 초창기 3D 기술로 만들어진 니나와 안나 월리엄스 자매는 지금 보기에는 흉측할 뿐이다. 하지만 빨간 드레스에 긴 장갑, 하이힐을 신은 안나에게 일부러 뺨을 맞아보는 것은 두근두근한 경험이었다. <소울 엣지>에는 한복을 입은 한국 여성 성미나를 비롯해 타키, 소피티아 등이 출연했고, <소울 캘리버>에서는 가죽옷을 입고 채찍형 칼을 든 아이비가 나왔다. 남자 캐릭터에 결코 밀리지 않는 대전 액션 게임의 강인한 여성들을 카이나 이시타와 비교하면 25년의 세월이 그대로 드러난다.
시대의 흐름에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2D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한 남코 걸들도 아직 존재한다. <테일즈> 시리즈의 루티나 필리아, 리아나, 메르디 같은 2D 캐릭터는 강인함보다는 귀여움에 치중되어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수동적으로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기보다는 아군의 주력으로 싸우는 건 2D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물론 레이코에서 히토미까지 <릿지 레이서>의 레이싱 걸들은 여전히 건재한다. 남코 걸들이 여자보다는 남자들을 위한 캐릭터라는 사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성 캐릭터의 흐름을 훑는 것만으로도 한 회사의, 나아가 일본 게임산업의 25년을 볼 수 있다. 점 몇개만으로도 캐릭터의 분노와 슬픔과 환희를 얼마든지 표현했던 시대가 있었는가 싶었는데 이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실물이라고 착각할 3D 캐릭터가 등장했다. 연인이 구해주러 오기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소녀에서 직접 칼을 잡은 강한 여인으로, 시대는 변하고 이는 게임에 곧장 반영된다. 다시 25년이 지난 뒤 남코 걸들은 어떤 모습일까? 알 수 없지만, 시대가 게임을 만든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