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시작하면 녹색 화면에 하얀 글씨가 떠오른다. 당신은 하얀 집의 서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에 서 있다. 문은 모두 판자로 막혀 있다. 그리고 집 앞에 조그만 우체통이 있다. 무엇을 해야 할까? 키보드를 두들긴다. ‘우체통을 열어라.’ 전단지가 들어 있다. 광고지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집의 남쪽으로 돌아가본다. 하지만 여전히 문이 없다. 창문은 모두 막혀 있다. ‘동쪽으로 가자.’ 약간 열려 있는 창문이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간다.’ 부엌이다. 10점을 얻었다.
게임을 구성하는 것은 텍스트뿐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 글로만 설명된다. 플레이어의 의지도 글을 통해서만 표현되고 관철된다. ‘우체통을 발로 찬다.’ 그런 건 소용없다는 핀잔이 돌아온다. ‘물을 마신다.’ 물병부터 집어라. ‘물병을 쥐고 물을 마신다.’ 뚜껑부터 열어라. 생각만으로는 소용없다. 일상의 암묵적 합의는 이 세계에 없다. 키보드를 움직여 모니터에 글을 써넣지 않고는 존재가 승인되지 않는다.
게임 <조크>는 1977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학생들이 처음 시작했다. 79년 메인프레임 버전으로 처음 완성되었고, 이후 ‘인포콤’에 의해 상업화되었다. 애플 컴퓨터와 PC로도 차례로 옮겨져 텍스트 어드벤처 시대를 주도했다. 지금도 PC용을 도스 버전으로 플레이할 수 있고, PDA용 버전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에는 한계가 없다. 어떤 기발한 상상도 기술이나 비용 제한없이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다. 그리고 자유롭다. 더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플레이로 그 세계가 한층 더 확장된다는 것이다. 앙상한 얼개 덕분에 오히려 더 압도적인 힘을 가진다.
1980년 전업 주부 로버타 윌리엄스가 구상한 어드벤처 게임 <미스테리 하우스>는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컴퓨터 화면에 글자 대신 그림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림이 너무 조잡해서 로버타가 아닌 여섯살짜리 어린 아들이 그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버타와 켄 윌리엄스 부부는 잡지에 나온 글자를 오려붙여 광고 전단과 사용 설명서를 만들었다. 도매상을 통하지 않고 직접 통신 판매에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노련한 프로그래머인 켄의 연봉보다 많은 월수입을 <미스테리 하우스> 하나로 올렸다.
사반세기가 흘렀다. 로버타의 선과 점만으로 이루어진 그림들은 유연한 곡선으로 바뀌었다. 녹색 바탕에 하얀 글자는 16컬러로, 256으로, 다시 트루 컬러로 진화했다. 더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데까지 치솟은 2D그래픽은 3D에 자리를 내주었고, 3D그래픽은 ‘실물과 똑같은’을 넘어 ‘실물보다 나은’의 자리를 슬금슬금 노리고 있다. 어쩌면 그래픽 게임 역시 어떤 기술과 비용의 제한없이 펼쳐지는 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3D그래픽 게임 세계가 텍스트 게임 세계보다 꼭 넓고 깊은 것 같지는 않다. 화려한 그래픽에 압도된 상상력은 게임 세계를 확장시키기보다는 포획되어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보이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이다. 유저들이 상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여성 캐릭터의 옷을 벗기는 누드 패치를 만들까를 넘어서지 못한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압도하기 시작한 건 게임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아니다. 텍스트 어드벤처를 반길 사람은 없다. 텍스트는 머릿속에서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텍스트의 시대는 죽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