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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反戰)을 영화 홍보에 도입한 <지구를 지켜라!>

시대의 파도를 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하기 바로 2시간 전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를 타자마자, 나는 <전쟁 중독: 미국이 군사주의를 차버리지 못하는 이유>라는 다소 긴 제목의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30분 전에, 나는 내가 보아왔던 그 어떤 만화들보다도 가장 나를 사로잡은 만화로 <전쟁 중독…>을 꼽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목 긴 사내 이야기>(박재동), <먼나라 이웃나라>(이원복), <타짜>(허영만) 등의 만화들과 우열을 가리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겠지만, 최근의 국제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무게를 더 실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제목만으로도 그 모든 내용이 설명되는 <전쟁 중독…>은, 걸프전 당시 초판이 발행되고 9·11 테러 이후 개정판이 발행되면서 미국 시장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만화책이다.

이라크전을 코앞에 둔 지난 2월 국내에서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른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군사대국 미국의 추악한 면을 잘 드러내주는 책’이라는 평가가 말해주듯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정치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왔는지를 쉽게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물론 비미국인들에게까지도 얼마나 큰 고통이 따랐는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만화 속 이야기들이 나와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까지 모호하게나마 ‘반미’의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는 확고한 신념을, 전혀 ‘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만화와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반전, 반부시를 외쳤던 마이클 무어가 쓴 <멍청한 백인들>을 통해 오랜만에 지적인 쾌감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사실 ‘반전’을 전면에 내세운 만화를 만나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다. 요즘 대중문화계에서 반전이 하나의 코드이자 트렌드로 인식되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반전 데모를 하는 남녀 주인공을 내세운 의류광고가 제작되었는가 하면, 가수들이 반전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고, 반전 내용을 담은 노래가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등장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반전을 영화 홍보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지구를 지켜라!>의 홍보 전략은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지구를 지켜라!>는 영화 개봉을 거의 두달여 앞둔 지난 2월11일 홍보용 이메일을 <지구일보>라는 신문의 형태로 발송하기 시작한 이래로, 시의 적절한 주제를 계속 선택해 주목을 끌어왔다.

첫 번째 호에는 한창 뜨겁던 로또 열풍에서 힌트를 얻어 ‘로또 열풍, 외계인까지 가세’라는 기사를 선보이더니, 약 10일 뒤에 발행된 두 번째 호에서는 달아오른 이라크전 분위기를 활용해 ‘부쉬, 이라크에서 차세대 비행체 쇼 연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던 것. 그 기사의 내용은 외계인인 부시가 이라크 상공에서 비행 쇼를 열어 외계인이 지구의 수호자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지만, 이는 모두 ‘쇼’이고 지구의 최고 자원인 원유를 독점하고 자기별의 경기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분석을 싣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반전 기사의 행렬은 전쟁을 약 일주일 앞두고 전세계적으로 반전 시위가 격화되던 3월14일치로 이어졌다. ‘외계인도 전쟁을 반대한다’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외계인들이 반전 시위에 참여해 있는 모습의 사진을 공개했던 것. 기사 내용도 범우주인연합이라는 단체가 ‘UN은 부쉬족과 같은 외계인들을 철저히 감시, 조사하기 위해 특별검사제를 실시하여야 한다’고 발표했다는 황당한 것이었다.

전쟁이 실제로 발발한 뒤에는 풍자의 강도가 훨씬 세졌다. 3월22일치 <지구일보>는 특집 영상뉴스로 편성된 플래시애니메이션 <싸마군 지구를 지켜라: 외계인 바이러스>를 선보였는데, 외계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정신도 못 차리는 부시 대통령의 항문을 통해 외계인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주인공 싸마군의 활약을 유쾌하게 그려낸 것. 더불어 ‘외계인 부쉬, 지구 습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전쟁의 발발을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4월1일치에서는 4칸 만화에 석유 중독에 빠진 부시 외계인이 식사를 거부해 몽둥이 찜질을 당한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물론 그 모두가 그냥 웃자고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멍청한 백인’의 대명사 부시를 마음껏 조롱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는 이들에게 주는 즐거움은 예측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독자의견 코너를 통해 표출되는 네티즌들의 평가도, 대부분 그런 시도들이 재미있었다는 쪽이다.

물론 그저 관객 한명이라도 더 끌어보겠다고 홍보사가 벌이는 홍보 전략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지구일보>나 이 영화의 홍보팀이 벌인 길거리 반전/영화 홍보 운동은 일고의 가치도 없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반전을 통해 잠재적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재빨리 파악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 홍보의 흐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바람처럼 홍보 전략이 성공적인 흥행 결과로 이어질지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 공식 홈페이지www.saveji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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