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꽃다발을 쥔 맨발의 히피들이 자기들을 진압하러온 경찰의 총구에 꽃을 꽂았다. 잠시 뒤 경찰은 몽둥이를 들고 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포를 메단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이 이라크로 모여들었다.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40년 전의 히피들도 있다. 그들은 이라크 국경 철조망에 꽃을 매달았다. 총구에 꽂은 장미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때는 몰랐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확실히 안다.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언더애쉬>는 한 젊은이의 삶에 대한 게임이다. 알루나드는 예루살렘에 사는 평범한 19살 아랍 청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야 할 나이지만 계속되는 휴교령과 언제 교실을 덮칠지 모르는 최루탄으로 별로 배운 게 없다. 부모님들말고는 가까운 사람도 별로 없다. 친구를 사귈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보이게 그리고 보이지 않게 수많은 폭력과 차별이 가해진다. 자기가 하급 인종으로 취급받고 있는 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작은 평화만 있으면 참을 수 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영원히 계속되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노래 가사처럼 세상은 알루나드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이스라엘군이 밀어붙인 불도저에 천장이 무너졌다. 어머니와 다섯 형제가 그 밑에 깔렸다. 테러리스트를 응징하는 이스라엘군의 라이플에 아버지 역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알루나드는 영웅이 아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무섭다. 도망가고만 싶다. 그래도 무기를 쥘 수밖에 없다. 침략자를 죽이지 않으면 침략은 결코 끝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총구에 꽂힌 장미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언더애쉬>는 정의에 대한 게임이다. 침략자를 죽여서 침략을 끝내려는, 가족과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투쟁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게이머는 일인칭 시점으로 싸움을 벌인다. 알루나드의 눈으로 참상을 보고 무기를 잡은 그의 손으로 침략자 이스라엘군을 해치운다. 미국과 이스라엘에서는 난리가 났다. 폭력을 선동하는 테러리즘, 이스라엘은 들끓었다. 수많은 해커들의 공격으로 사이트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런 장르의 게임치고 폭력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또한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 사슴 사냥이라도 하듯 무조건 테러리스트를 죽이고 또 죽인다. 그들이 왜 싸움에 나서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가족과 친구들을 불도저와 탱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젊은이라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된다. <언더애쉬>의 개발자들은 말한다. 이 게임 속의 폭력은 대부분의 게임들처럼 더 많은 자극을 원하는 게이머를 위한 상업적 폭력도 아니고, 이스라엘에서 이야기하듯 ‘증오의 부추김’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게임이 폭력을 유발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많은 연구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게임이 청소년에게 폭력을 부추기는 유해물이라고 이야기하고 또 다른 연구들은 다른 모든 미디어보다도 유독 게임에만 책임을 돌리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어떤 입장에 서 있는 연구든 추상적인 폭력만을 다룬다. 폭력의 구체적 모습에는 아직 눈을 돌리지 않는다. 힘있는 자가 약한 자를 학살하는 폭력과 살아남기 위해서 행하는 폭력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저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비난할 뿐이다.
폭력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구별할 필요는 있다. 침략은 침략자에게 죽음을 안겨주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 총구에 꽃을 꽂아도 총알은 발사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맨발로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