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극장-죄와 벌> MBC 매주 월요일 밤 11시
사건 1. 서울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들은 이미 숨을 거둔 여성과 겁에 질린 채 떨고 있는 네살배기 딸을 발견했다. 이 사건은 화재를 위장한 강도 살인인 것으로 드러났는데, 유일한 목격자인 어린 딸은 진범을 지목할 수 있을까?
사건 2. 인기 정상을 달리던 가수가 숙소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그의 여자친구. 그녀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한 동물병원에서 마취제를 구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혹은 한층 커졌다. 그렇다면 인기가수의 팔에 선명한 28개의 주사 자국은 정말 그녀가 한 짓일까?
사건 3.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세 친구가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 친구는 의식불명 상태인 나머지 한 친구를 운전자로 지목했다. 의식을 찾았으나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는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번 사고에 책임을 질 운전자는 과연 누구일까?
MBC <실화극장-죄와 벌>의 두툼한 사건 파일을 살짝 들춰보기만 해도, 동공이 커지고 온몸이 근질거린다. 솟아오르는 궁금증, 못 말릴 호기심 때문이다.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으나 끝내 미궁에 빠져버린 사건들,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었다가 극적인 반전을 거쳐 가까스로 의혹을 벗은 사건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논픽션’의 이름으로 방영되니 사건의 내막과 재판부의 결론이 더욱 궁금해진다.
국내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실화극장-죄와 벌>은 실제 자료나 피해자 혹은 피의자의 증언으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주요 무대는 가상의 법정. 변호사와 검사의 치열한 공방이 펼쳐지는 사이, 배우들이 당시 상황을 ‘재연’해 보여준다. 어느 한쪽을 편들기 어려울 정도로 팽팽한 검사와 변호사간의 줄다리기, 그리고 극적인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는 재연극이 <실화극장-죄와 벌>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큰 축인 셈이다. 그러므로 <실화극장-죄와 벌>을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미스터리다큐멘터리 범주에 묶는 것은 무리일 듯싶다. 실험과 자료, 증언을 통해 미궁에 빠진 사건이나 호도된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바람직한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제작된 프로그램은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다시금 법정에서 진의를 밝히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실화극장-죄와 벌>은 영화 처럼 의혹에 휩싸인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건들을 가상의 법정으로 불러내어 시청자와 사건 당사자들의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해주기 위한 프로그램일까? 현실의 법정에서는 다룰 수 없지만, 진실을 밝힘으로써 다시는 억울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작진은 누가 보아도 진실이 궁금할 정도로 미묘한 사건들만을 택해 소재로 삼으면서, 정작 사건의 진실은 말하지 않는다. 경찰 조서와 재판 기록을 토대로 사건의 전말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고, 시청자들의 궁금증과 피해자의 억울함은 여전하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실화극장-죄와 벌>은 제목 그대로 ‘실화’에 기초하기 때문에 막연한 심증만으로 재판부의 결정을 부인하거나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제작진이 사건을 독자적으로 조사해 제3의 의견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려 한다면, 굳이 ‘극장’의 형식을 빌려야 할 까닭이 없다.
결국 <실화극장-죄와 벌>이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민사, 형사사건들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은 프로그램의 ‘태생적 한계’인 셈이다. 차라리 ‘허구’를 내세워 사건을 재구성하고 사건 당사자들로부터 쏟아지는 갖가지 비난과 항의를 피해갔던들 방송을 지켜보는 심정이 이처럼 허탈하지는 않을 것 같다.
<실화극장-죄와 벌>의 법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냥 호기심으로, 막연한 궁금증 때문에 방송을 지켜보기엔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너무나 끔찍하고 선정적이다. 유괴와 성폭행, 살인과 같이 시청자는 물론 사건 당사자들이 다시금 상기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을 법정으로 불러내려면 그에 합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한다. 제작진이 프로그램을 만든 의도가 무엇인지, 그것이 정말 알고 싶다. 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