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치자 돌아오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인 빅터 핸슨이 저술한 <살육과 문명: 서구의 세계 제패에 기여한 9개의 전투>(Carnage and Culture)라는 책은, 서구 문명이 전쟁에 강한 이유를 그리스 문명의 영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발전시킨 서구식 병법과 그 기저에 있던 그리스식 문화가, 그리스가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한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을 시작으로 비서구권과 벌어진 주요 전쟁에서 승리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전쟁에서 이겨온 서구사회에 대한 우월주의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문제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서양인들은 테러와 기습 공격을 받아 우리가 당한 작은 희생을 놓고, 적이 ‘비겁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한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공격은 끔찍한 손실을 입히더라도 이를 ‘공정하다’고 한다”라는 저자의 의견에 함축되어 있다.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을 보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모든 언어는 그리스어에서 시작되었다며 ‘기모노’까지 그 유래를 찾아내는 거스의 과장되긴 했지만 일리가 있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시각에서 봤을 때보다 서구 문명에 그리스라는 국가가 끼친 영향이 훨씬 크고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두 번째는 비록 나라가 달라도 같은 문화권의 같은 인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무리없이 섞이는 서구 특히 미국의 백인들이, 왜 그리 타문명권이나 타인종에 대해서는 잔인할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버젓이 민간인에 공격을 일삼고 핵무기로 주변국을 위협하는 이스라엘에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반면, 유엔의 결의를 따르겠다는 이라크에는 전쟁을 거는 미국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
로맨틱 코미디영화를 보면서 굳이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하는가라고 나 스스로도 반문을 했었기 때문에,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보다는 <나의 그리스식 웨딩>의 상상을 뛰어넘은 성공에 힘입어 제작되었다는 TV코미디 시리즈 <나의 그리스식 인생>(My Big Fat Greek Life)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나의 그리스식 인생>은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토마스 밀러 역의 스티븐 에크홀트(왼쪽). 한 행사장에 나타난 니아 바르달로스와 스티븐 에크홀트(오른쪽).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이 다시 모인 <나의 그리스식 인생>.
빅터 핸슨이 저술한 <살육과 문명: 서구의 세계 제패에 기여한 9개의 전투>.
다만 영화가 결혼 뒤 몇년이 지나 딸을 키우는 두 주인공의 모습에서 끝맺는 것과 달리 TV시리즈는 그들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등장인물들은 영화와 완전히 똑같아서, 여주인공의 아버지 거스, 그의 부인 마리아, 남동생이자 요리사인 닉, 이모인 보울라 그리고 사촌인 니키가 여전히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하나는 영화에서 주인공 툴라를 연기했고 TV시리즈의 각본 및 공동제작자로 참여한 니아 바르달로스의 영향으로 여주인공의 이름이 ‘툴라’에서 ‘니아’로 바뀌었다는 것. 두 번째는 그녀와 결혼하는 인물 이안 밀러는 이름과 함께 배우까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이안 역을 연기했던 존 코벳이 새롭게 시작하는 다른 TV시리즈 <러키>(Lucky)의 출연을 위해 고사를 하자, <병 속에 담긴 편지> 등의 영화와 많은 TV시리즈에서 잔뼈가 굵은 스티븐 에크홀트가 선발되어 토마스 밀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조연급들처럼 두 주인공 니아와 토마스 역시 영화 속 툴라와 이안과 동일인물로 설정돼 있어, 내용상으로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스티븐 에크홀트가 니아 바르달로스와 이전부터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연기 호흡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그렇게 새로운 식구를 맞이한 뒤, <나의 그리스식 인생>은 지난 2월24일 월요일 밤 <CBS>를 통해 그 첫 번째 프리미어 에피소드를 선보였다. 일단 외형적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무려 2300만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아, 1998년 이후 가장 성공적인 데뷔를 한 시트콤이란 영예를 안았기 때문. 하지만 내용상의 평가는 엇갈렸고, 사실 부정적인 쪽이 우세했다. 아테네로 신혼여행을 떠났던 주인공들이 공항에 돌아오자마자 포르토칼로스 가족들이 들이닥쳐 신혼여행이 행복했는지, 임신은 한 것 같은지, 선물로 받은 집은 어떻게 할 건지 등을 꼬치꼬치 캐묻고 귀찮게 하는 과정에서 주변 등장인물들이 그저 영화에서 고정된 이미지들을 과장해 보여주는 데 그쳤다는 것. 거기에 개신교를 믿는 백인 앵글로 색슨족(WASP)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존 코벳의 아우라를 살리지 못한 스티븐 에크홀트에 대해 실망의 목소리도 더해졌다. 그 때문인지 정규 방송시간인 일요일 저녁으로 옮겨져 방송된 두 번째 에피소드는 1660만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으는 데 그쳤다.
몇번의 에피소드가 더 방영된 현 시점에서 IMDb에 올라온 시청자들의 의견도 ‘다소 실망스럽지만, 조금 더 지켜보자’로 축약되고 있다. 다행히 바람난 남편을 떠나 그리스에서 날아온 사촌 이야기, 무료 점심을 중단하자 주차문제로 꼬투리를 잡는 경찰 등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한결 나아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문제는 그래도 <나의 그리스식 인생>이 성공적인 사례로 남을까 하는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주인공이자 작가이면서, 공동제작자이기까지 한 니아 바르달로스의 큰 영향력이 이 시트콤의 강점인 동시에 잠재적인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시트콤이라는 장르에서 얼마나 발휘하는지에 따라 성패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가진 태생적 한계인 것이다.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나의 그리스식 웨딩> 공식 홈페이지 : http://movies.yahoo.com/greekwedding
<나의 그리스식 삶> 공식 홈페이지http://www.cbs.com/primetime/my_big_fat_greek_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