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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들 고생하시는 것에 비하면‥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 알림을 보다가 옛날 생각을 한다. 공모 마감 시즌이 되면 <씨네21> 편집실엔 커다란 ‘세멘봉투’를 든 외부인의 방문이 잦아진다. 이들은 편집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이 맞는 사람에게 “시나리오 공모 때문에 왔는데 어디다 내면 되죠?”라고 묻는다. 대답은 늘 똑같다. “거기다 두고 가세요.” 편집실 한쪽 테이블엔 봉투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다. 이들은 그 위에다 봉투 하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모종의 사무가 남아 있다는 듯 쭈뼛쭈뼛한다. 입양기관에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는 엄마의 표정이다. “접수번호 같은 거 없나요?” “영수증 같은 건 안 주나요?” 기자들은 방문객의 질문이 두 번째 스테이지로 넘어가면 오직 귀찮을 뿐이다. “그냥 놓고 가시면 돼요.”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이런 전화도 받는다. “우송했는데 혹시 배달사고가 났을지 몰라서.” “제 동생이 오늘 시나리오를 갖다냈는데 제대로 접수됐는지 확인하고 싶은데요.” 만일 접수시작 하루이틀째라면 봉투들 무더기를 뒤져서 확인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감이 임박했다면 몇 백개나 되는 봉투를 일일이 확인한다는 건 종교적인 신심이나 자선가적 선량함을 필요로 할 것이다. 어쩌면 그때 나는 불특정 다수 응모자들의 과도한 소심함을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칼자루 잡은 사람이 어찌 칼날 잡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갑’은 ‘을’이 돼보지 않고서는 절대 ‘을’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무명작가로서 내 원고를 모처에 갖다내는 입장이 되었다. 모처엔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도 있고 해서 독일서 오래 살다온 내 친구를 보내기로 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나는 친구에게 원고봉투를 건넸다. 친구는 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뜻밖에도 카메라를 꺼냈다. “카메라는 왜?”라고 묻자 친구는 “전달하는 걸 찍어두려고. 증거를 남겨둬야 하니까”라고 한다.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는 표정이다. 나는 잠시 입을 딱 벌리고 친구 얼굴을 쳐다보다가 카메라를 뺏어서 도로 집어넣었다. 친구는 내게 “그럼 어떡하니? 입증자료를 남겨야 할 텐데”라고 한다. 참고로, 이 친구는 독일서 18년이나 공부하고 돌아왔다. 나는 “접수번호나 알아다 줘”라고 말했다. 친구는 5분쯤 뒤에 돌아왔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복도에서 만난 사람이 왜 왔냐고 묻더니 봉투를 받아서 어디로 가져갔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 하더라. 접수번호는 몇번이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 없대.”

나는 그뒤 며칠 동안 공연히 불안했다. 접수가 제대로 됐는지 전화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야 했다. 복도에서 원고를 가져간 사람은 누구일까. 어쩌면 원고도둑일지도. 그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져갔단 말이야.

며칠 지나면서 근심걱정도 나름대로 진도가 나갔다. 책상 위에 봉투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을 텐데 내 봉투가 바닥으로 흘렀으면 어떡하지. 직원들이 팔을 덜렁거리며 지나다니다 봉투를 툭 쳐서 떨어뜨렸을 수도 있어. 그걸 청소부 아줌마가 쓸어담아서 쓰레기통에 넣었을지도 몰라. 이처럼 다분히 공상과학적인 걱정을 하고 있자니 누군가 “박완서 선생도 데뷔 시절 <여성동아>에 원고를 보내놓고 발표날 때까지 우체부가 잘 전달했을까 걱정했대”라고 위로한다.

그날 원고를 내고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잠시 공상에 잠겼었다고 고백해야겠다.

나는 소설원고가 든 봉투를 모처에 제출한다. 담당자는 봉투를 받고는 명함을 건네면서 말한다. “저는 담당자 김아무개입니다. 앞으로 의문나시는 점 있으면 이리로 전화하십시오.”

담당자는 봉투를 받아서 철제 캐비닛에 넣고는 손잡이를 돌려 잠근다. 그는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컴퓨터에 소설제목과 이름, 이메일주소, 전화번호를 써넣는다. 잠시 뒤 프린터가 디리릭디리릭 하더니 담당자가 접수증을 건네준다. “접수번호가 11만2599번입니다. 응모자가 조금 많군요. 발표는 5월5일입니다. 당선자는 물론 낙선자에게도 이메일로 통고합니다.”

나는 놀라서 소리친다. “아니! 10만명이 넘는 사람들한테 일일이 다 메일을 보내준다구요?”

담당자는 쑥스러운 듯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띠고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물론입니다. 그 정도야 별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작가님들이 작품 쓰시느라 고생한 거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요.” 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